* 본 포스팅은 2022년 1월 13일 삼프로TV 채널에서 방송된 백브리핑 라이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해당 방송은 2022년 1월 15일부터 1월 21일까지 이어지는 문재인 대통령 중동3개국 순방을 앞두고 방송되었습니다.
* 포스팅은 방송 내용에 따르되 순서 및 분량은 일부 재구성하였습니다.
* 방송 내용 외 추가한 부분은 별도로 표시하였습니다.
Q. 이번 대통령 순방은 어떤 목적으로 가게 되었는가?
A. 사실 더 많은 순방이 필요했으나 코로나로 충분히 이루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초반에는 이낙연 총리가 주로 중동 순방을 다녀왔다. 정상외교라는 것은 최고의 외교무대다. 일반 외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더 일찍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순방이 이루어진 것이 다행이다.
이번엔 3개국을 간다. UAE, 사우디, 이집트이다. 앞의 2개 나라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나라다. 함께 많은 사업을 하고 있고 특히 사우디는 한강의 기적부터 끈끈한 연이 있다. 한국을 바라보는 사우디의 시선도 좋다. 사우디는 국제무대에서 북한과는 별다른 외교가 없다. 물론 사우디 입장에서는 (그들이 북한과 거리를 두듯이) 한국도 이란과 거리를 두고 사우디와 더 끈끈해지기를 원한다.
이집트는 현재 3개국 중 가장 경제력이 약하지만, 한때 중동에서 '최초'의 타이틀이 붙은 일은 대부분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과거 영화 강국으로도 유명했다. 이집트가 힘을 잃은 것은 1970년대 이후 산유국의 부상과 연관있다. 최근에 다시 강력한 지도자가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떠오르고 있다. 동지중해에서 가스전도 발견되었다.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아 한국과 협력을 원하고 있다. 실제로 이집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방문을 고대해왔다.
Q. 중동에서 석유시대의 종말에 대한 우려가 정말 심각한가?
A. 아주 심각하다. 두바이 같은 경우는 관공서마다 '산업 다각화가 미래'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만약 과거 산유국들이 석유와 연관된 화학산업을 함께 육성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유가가 떨어지고 세계 여러나라들이 4차 산업혁명의 길로 가자 산유국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유가가 산유국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세금을 바탕으로 내년도 예산을 세우지만 산유국들은 세금을 거의 거두지 않고 석유 판매 이익금으로 국가 예산을 세워왔다. (중동 산유국들은 최근에서야 부가가치세를 걷기 시작했다.) 2014년 미국에서 셰일혁명이 일어나고 저유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아랍에미레이트의 경우 최근 휴일을 토~일요일로 변경했다. 과거에는 예배일인 금요일까지 휴일로 지정했었다. 휴일을 다른 나라와 동일하게 설정하면서 비즈니스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가령 이란의 경우 목~금요일이 주말이다. 이런 경우 비즈니스할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3일(월~수)에 불과하다. UAE는 이런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다.
사우디의 경우 출생률이 높아 30세 미만 인구가 50%를 넘는다. 젊은 인구가 폭증하고 왕세자 또한 젊은 나이(85년생)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관광산업의 경우 알 룰라 지역이 대표적이다. 사우디에도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 많다. 다만 호텔을 비롯한 인프라가 부족하다. 최근에는 스포츠 경기장에도 남녀가 함께 사우디의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다. 보수적인 사우디가 변하니 다른 나라들도 함께 변하는 추세다.
UAE의 경우 오래 전부터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려왔다. UAE에는 7개 왕국이 있는데 가장 큰 아부다비의 국왕이 연방 대통령을 맡고 두 번째로 큰 두바이가 총리를 맡는다. 아부다비는 우리나라의 부자동네인 성북동이나 한남동처럼 조용하다. 그러나 두바이는 강남 같은 곳이다. 오래 전부터 두바이는 많은 사업을 진행해왔다. UAE 석유의 92%를 아부다비를 차지하고 있고 두바이는 6% 정도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많은 혁신을 진행해온 것이다. 두바이 공항을 항공 허브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Q. 혁신에 대한 내부 반대는 없나?
A. 사우디의 경우 노년층이나 종교인사들로부터 반대가 있다. 이것을 잘 풀어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걸프 국가들의 경우 자국민 노동자수가 적다. 그나마 사우디는 노동시장의 70%가 자국민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 노동자들이 엄청 많다. 적은 인구가 그 원인이기도 하다. 아랍에미레이트의 경우 인구가 1천만 명 정도 되는데 외국인이 80%를 차지하고 있다.
사우디에서는 자국민 노동자를 늘리기 위해서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자국민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으나 오히려 자국민 노동자에 대한 불신과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제조업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라)
사우디 법에 따르면 해외 기업이 사우디에 진출할 경우 현지 인력을 고용하도록 되어있는데 이는 주로 보증인의 성격이고 실제로 업무에 참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분 역시 51:49 정도로 사우디 측 지분이 더 크도록 규제하고 있다. 일반 종업원 역시 사우디 노동자 쿼터제가 있는데 이 역시 실제 업무에 투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 회사들은 대개 이 비용을 손실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비효율적인 상황을 사우디를 비롯해 여러 중동 국가에서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다.
Q. 현지 노동자 고용이 비효율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A.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국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소득을 보장해주다보니 국민들 입장에서는 숙련 노동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 석유가 '신의 선물'이라고는 하나 산유국이면서 다른 산업도 함께 발전한 경우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미국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석유를 신의 선물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 같다.
마이클 로스(UCLA 정치학 교수)가 약 10년 전 중동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이유를 분석했다. 그는 그 원인을 이슬람교가 아닌 석유와 이에 따른 산업구조라고 결론내렸다. 석유는 사람을 많이 고용하지 않는 산업이고 고용을 해도 남성 노동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여성의 사회참여율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산유국 일수록 여성인권이 낮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반례로 튀니지는 이슬람 문화권이지만 산유국이 아니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고 사회참여율, 교육율이 높다. 이 때문에 여성 인권도 높고 정치 참여율도 높다.
석유와 중동 침탈의 역사
1859년 에드윈 드레이크가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처음 시추공(파이프 & 드릴)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석유 시추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동 침탈의 역사도 석유로부터 시작되었다. 1908년, 영국이 이란 마드제드 솔레이만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 마드제드 솔레이만 : '솔레이만의 모스크'란 뜻인데 실제 모스크는 아니고 과거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사람들이 모스크라고 부르던 것이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1901년브터 현재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지역인 아드로스 산맥에 석유가 매장되었다는 보고가 발표되기 시작한다. 당시 투자의 달인으로 불리던 영국인 윌리엄 달시는 이란 국왕으로부터 이란 내 석유 채굴권을 구매한다. 현재 가치로 약 84억원을 지불하고, 석유회사의 지분 16%를 대가로 60년간 이란 전역에 대한 채굴권을 보장받는다. (이란과 러시아 접경지대는 대상지역에서 제외)
그러나 석유탐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윌리엄 달시는 당시 버마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던 지질학자 레이놀즈를 투입했음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결국 달시는 채굴권을 타인에게 판매하고자 했는데 당시 군함의 동력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하고자 했던 영국 정부가 이 판매를 막았다. 대신 버마 석유회사가 달시의 이란 석유사업에 투자하게 되었다. 1908년 5월 16일, 앞서 언급한 마드제드 솔레이만의 유정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니 10일 뒤에는 석유가 터져나왔다. 달시는 이 사업으로 떼돈을 벌었으나 레이놀즈는 해고 당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된다.
1년 뒤인 1909년, 현재 영국 BP의 전신인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컴퍼니가 만들어진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프랑스, 독일 등 다른 나라도 중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912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터키 석유회사를 설립한다. 여기에는 독일과 영국이 25%씩 지분을 갖게된다. 영국은 당시 소유하고 있던 터키은행을 통해 이 사업에 투자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빠지고 그 지분을 프랑스가 차지한다. 미국 역시 해당 사업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로 실패한다.
1927년에는 현재 이라크 키르쿠크 지역인 바바 구르구르에서 어마어마한 석유가 발견된다. 열강들은 컨소시엄을 구성에 사업에 참여한다. 영국의 앵글로-페르시안 컴퍼니, 프랑스의 CFP(현재 토탈의 전신), 미국의 석유회사 연합체(대표사는 쉐브론), 네덜란드의 로열더치셀까지 총 4개 기업이 참여했고 각각 24.75%씩 지분을 차지한다. 남은 5%는 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데 공을 세운 아르메니아인(미스터 5%)에게 돌아간다. 이후 중동 석유의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된다. 그리고 영국은 해군 군함의 동력원을 석유로 바꾼다. 이미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석유를 동력원으로 하는 군함의 위력을 경험했다.
바레인과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루즈벨트
1932년에는 바레인에서, 이후에는 쿠웨이트에서도 석유가 발견된다. 사실 바레인은 초기에 석유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땅이다. 바레인 석유사업을 진행한 영국인 사업가가 채굴권을 앵글로-페르시안 컴퍼니에 채굴권을 판매하고자 했으나 회사에서 인수를 거부할 정도로 가능성을 낮게 봤더 곳이다. 그러나 이후 바레인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바레인과 지질이 비슷한 사우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1933년부터 사우디에서 석유탐사가 시작되고, 1938년 사우디에서 어마어마한 석유가 발견된다. 당시 탐사 중이던 유정 중 7번째 유정이었던 Prosperity Well에서 첫 석유가 터진다. 사우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사우디 동쪽의 가와르 유전 등 다양한 곳에서 석유채굴이 이루어 진다.
이후 미국와 영국은 중동의 석유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주미 영국대사 펠릭스를 불러 합의를 도출한다. 이란 석유는 영국이 독점, 쿠웨이트와 이라크 석유는 영국과 미국이 나눠쓰고, 사우디 석유는 미국이 독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후에도 사우디에 대한 미국의 행보는 적극적이었다. 1945년 얄타회담이 끝날 무렵,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 총리였던 처칠에게 회담 이후 사우디 국왕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후 루즈벨트는 지중해를 거쳐 홍해로 들어가 미국 군함에서 사우디 국왕이던 이븐 사우드를 만난다.
이븐 사우드 국왕은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는데 루즈벨트 역시 어릴적 소아마비로 인한 불편이 있었다. 루즈벨트는 가져간 자신의 휠체어 2개 중 하나를 사우디 국왕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고 겸솜하게 사우디 국왕을 접견한다. 이 날부터 사우디 국왕은 루즈벨트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선물받은 휠체어는 크기가 작아 실제로 사우디 국왕이 이용하진 못했지만 그는 이후 내내 '나의 친구 루즈벨트'가 준 선물이라며 휠체어를 자랑하고 다녔다. 루즈벨트가 사우디 국왕을 만난 1945년 2월 14일, 게임은 끝난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는 서로 안보와 석유를 약속했고 이후 미국은 안정적으로 석유를 통제할 수 있었다. 정상외교의 성공적인 사례다.
한편 화가 난 처칠은 영국 외교부를 닥달해 사우디 국왕을 접견하게 된다. 그러나 처칠은 사우디 국왕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나의 종교는 술을 마셔도 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처칠은 사우디 국왕을 위해 뒷좌석을 화려하게 꾸민 롤스로이스를 선물했는데 국왕은 단 한번도 그 차를 타지 않았다. 사우디에서 국왕은 조수석에만 탑승하며 뒷자석은 여성들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모사데크 총리 축출과 미국-이란 관계
이란의 석유를 독점한 영국은 오래지 않아 강렬한 이란 민중의 반발에 직면한다. 영국은 생산량, 판매량, 매출, 가격 등을 이란 측에 단 하나도 공유해주지 않았다. 결국 석유 국유화에 대한 요구가 이란 내에서 터져나오게 되고, 이에 미온적이었던 라즈마르 총리가 암살당하고 만다.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모사데크가 1951년 집권한다. 모사데크는 집권하자마자 이란 내 영국의 석유자산을 모두 국유화해버린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보가 서구의 시선에는 공산주의자로 보이기 충분했다.
영국은 국제시장에서 이란산 석유의 판매를 금지하는 등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트루먼은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를 예로 들며 영국이 어느 정도는 양보를 해야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후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영국은 아이젠하워를 설득한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영국은 현재 이란 정부는 소련과 가까우니 이곳에서도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미국을 설득했다. 결국 미국은 여기에 넘어간다.
1953년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는 당시 왕이던 팔라비 왕의 재가를 받아 총리를 해임시키는 쿠테타에 착수한다. 이것은 미국 CIA의 첫 번째 해외공작이었다. 당시 모사데크 총리의 인기가 높아 팔라비 왕도 주저하였으나 마지못해 이 해임안을 승인한다. 그러나 쿠테타는 실패하고 만다. 8월 15일 1차 쿠테타의 실패 후, 미국과 영국은 4일 뒤 2차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로마에 있었던 팔라비 왕은 귀국을 꺼렸으나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귀국하였으며 왕위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이란과 미국이 밀접한 관계로 발전한다. 이후 미국은 이란을 선진국으로 만든다는 명분 하에 다양한 혁명 프로그램을 만든다. (백색 프로그램, 근대화 프로그램 등). 본격적인 프로그램은 1963년부터 시작된다. 남녀공학 도입, 여성교육 확대 등이 대표적인 정책이었고 미국은 흐뭇한 눈으로 이란을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사우디에 비해 이란이 미국과 가까웠으며, 미국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수용도도 이란이 높았다. 지금과는 반대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이란 국민들이 미국에 가장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모사데크 총리 추출이다. 모사데크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였기 때문이다. 2000년에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가 이란을 방문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제2차 중동전쟁과 미-소 경쟁의 시작
1956년에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국유화된다. 그전에는 영국와 프랑스가 공동 소유하고 있었다. 쿠테타로 집권한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국유화시킨다.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수에즈 운하고 곧 석유 통로나 다름 없었다. 이들은 미국을 따돌리고 이스라엘과 힘을 합쳐 같은 해 수에즈 운하전쟁(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크케 반발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석유공급을 하지 못하도록 국제사회에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과 가깝던 이집트가 이 전쟁을 말미암아 완전히 소련의 영향권 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이집트와 가깝던 소련은 핵 사용을 언급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국제무대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사라진다.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만이 남게 된다.
OPEC결성과 세븐 시스터즈
1960년 9월에 OPEC이 만들어진다. OPEC 이전에는 산유국 정부가 아닌 석유회사들이 석유와 관련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했다. 그들을 세븐 시스터즈(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따온 표현)라 고불렀다. BP, 로얄더치셀, 쉐브론(당시에는 텍사코, 걸프, 갤리포니아 오일컴퍼니), 엑슨모빌(당시에는 뉴저지, 뉴욕)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OPEC이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다. 명목상 카르텔이긴 하지만 벌칙조항이 없다. 따라서 감산이나 증산이 합의대로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븐시스터즈는 OPEC 이후 과거의 힘을 다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새로운 세븐 시스터즈가 떠오르고 있는데 사우디의 아람코, 중국의 시노펙, 러시아의 가스프롬, 이란의 국영석유회사와 말레이시아, 브라질, 베네수엘라가 그것이다. 이들이 전세계 석유 매장량의 1/3, 생산량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중동 순방과 수소 경제
이번 순방의 당면 과제는 수소산업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수소를 직접 생산하면 단가가 비싸지만, 자원이 많은 중동에서 생산하면 훨씬 저렴하다. 수소 생산에 가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동의 산유국들과 협의하여 수소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추가)
중동은 천연가스가 풍부해 천연가스를 통해 생산하는 블루수소를 공급받기에도 용이하며, 재생에너지(태양광 등)을 통한그린수소 생산에도 적합하여 수소 경제의 파트너로 적합하다. 현재 그린 수소의 경제성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았고 그린 수소가 상용화되기 전까지는 블루수소의 활용이 필요하다.
○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약칭 MBS)의 주도로 수소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2019년 빈 살만 왕세자는 서울의 44배 규모에 달하는 '네옴시티'를 건설하고 그 안에 4GW 규모의 그린수소 생산시설을 세우는 계획을 발표했다. 네옴시티는 일평균 그린수소 650t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수소버스 약 2만대를 운행할 수 있는 양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세계 최대 상업용 수소공급업체인 에어프로덕츠, 사우디의 ACWA파워와 합작기업을 세웠다.
사우디와는 이번 순방을 통해 총 14건의 MOU를 체결했는데 이중 6건이 수소와 관련된 내용이다.
○ UAE
현대차는 수소버스를 UAE에 제공하고, 삼성물산은 UAE 그린 수소 프로젝트 EPC 참여를 추진 중이며 E1은 UAE 암모니아 및 액화 수소 수입 등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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