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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인남식 교수의 중동학개론 2부 (쿠르드의 역사)

Varsika 2022. 3. 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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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2022.02.27.

 

 

인남식 교수가 설명하는 아랍의 범위(신과함께 캡쳐)

전세계 지도를 보면 80~90%가 삐둘삐둘한 국경을 갖고 있다. 자연환경적 국경(형태학적 국경획정, physiographic border demarcation)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중동에서 볼 수 있는 직선 국경은 기하학적 국경(geometirc border)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하학적 국경을 긋기 전에는 누구의 땅이었을까? 바로 오스만 투르크의 땅이었다. 즉, 중동 대부분의 땅이 지금의 터키의 땅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오스만 투르크(터키)의 땅을 떼서 영국과 프랑스가 이러한 기하학적 국경을 그었다. 그리고 이런 기하학적 국경이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중동 형성의 3가지 사건 중 하나이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사이크스-피코 합의이다. 이 합의를 바탕으로 영국은 중동의 석유를 얻고자 했고, 프랑스를 대륙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고자 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외교관인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와 피코가 만나 전후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논의한 것이다.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처럼 전성기를 구가하고 싶었고 프랑스는 영국에게 빼앗긴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고 싶어했다. 

 

영국 영향권 : 이라크(붉은색), 요르단(핑크색) 프랑스 영향권 : 직접 통치(파랑색), 시리아(연보라색), 레바논 공화국(노란색)

 

 

제국분할의 첫 번째 부작용: 인위적 국경선으로 갈라져 버린 민족

 

종전 후, 제국이 인위적으로 쪼개지며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과 같은 국가는 20세기 전에는 존재한 적도 없는 나라였다. 동시다발적으로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정체성도 없이 신생국가의 국민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제국의 신민으로 이스탄불의 술탄에게 세금내며 500~600년을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느닷업이 오랫동안 유지되던 하나의 공동체가 직선국경이 그어지며 갈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남북분단도 동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동에선 대표적인 사례가 3천만의 인구를 가진 쿠르드족이다. 이들은 자기나라를 갖기 못한 세계 최대 민족이다.  

 

쿠르드족 인구 분포도

쿠르드족은 4개국에 걸쳐서 약 3천만 명이 살고 있는데 어차피 인공국가를 만들 것이었다면 이런 종족 분포에 따라 국경선을 그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영국 역시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3개 조약 중 하나에 쿠르드족의 자치를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라크 북부지역(쿠르드족 밀집지역) 키르쿠크(Kirkuk)에서 유전이 발견된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고등 판무관이었던 영국 외교관이 런던으로 이 소식을 전하며, 쿠르드족이 독립국가를 결성하면 이 석유를 영국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전한다. 이 당시 식민 장관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해군장관을 역임하며 석유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던 사람이었다. 증기기관 함대를 모두 디젤로 교체하면서 엄청난 무력의 상승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대영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석유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이었다. 

 

쿠르드족은 아주 자존심이 강하고 용맹하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살라딘 장군이 바로 쿠르드족이다. 이슬람계 최초로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가 바로 쿠르드족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페르시아에 비견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용맹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결국 쿠르드족은 3개의 신생국가와 터키로 쪼개지면서 4개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터키 동부의 쿠르드족은 PKK라는 정당을 결성해 터키 중앙정부와 큰 갈등을 빚고 있다. 이들은 정치정당으로는 드물게 자살테러를 행하기도 한다. (자살테러는 주로 종교단체에서 행하는 경우가 많음) 이처럼 쿠르드가 아주 비극적인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힘으로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구심점이 만들어 진다. 이것이 테러, 독립운동, 분리주의 등으로 나타나고 쿠르드족은 지금 중동의 세태를 읽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ISIS 역시 쿠르드 거주지인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ISIS는 2014년 국가를 선포했다. ISIS는 초창기 유럽인들은 인질로 잡아도 협상 후 풀어주었지만, 앵글로 색슨은 계속 참수했다. 영미권을 도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내 정서는 이미 중동에 지상군을 파견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결국 쿠르드 민병대와 손을 잡게 된다. 시리아 동북부의 YPG라는 쿠르드 민병대가 대표적이다. 미군은 공중 폭격과 민병대 지원을 담당했다. 쿠르드 민병대는 기존에도 잘 싸운다고 정평이 나있었고 실제로 ISIS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쿠르드족은 미국과 함께 싸우면서 독립국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치권을 보장받는 집단, 이라크-쿠르드 정도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당시 미국과 서유럽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에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ISIS에 대한 승이를 선언한 후에 쿠르드족의 국가건설을 절대 반대한 미국의 동맹국이 있었다. 바로 터키다.

 

터키 접경에 쿠르드족의 준독립국가가 생기는 순간 터키 접경을 넘나드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된다. 터키 입장에서는 터키 동부에 대한 안보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결국 터키의 반대로 미국은 쿠르드 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쿠르드족 입장에서는 100년을 사이로 한번은 영국에게 한번은 미국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도 미국을 비판했다. 피를 흘린 전우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 터키를 버릴 수 없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터키 남부에는 있는 인시를릭이라는 도시에 나토 공군기지가 있다. 여기에는 미군 전술핵 50기가 배치되어 있다. 거기다 이스라엘을 보호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곳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제국분할의 두 번째 부작용: 한 국가에 모인 철천지 원수들

사막에는 각 부족들의 영역이 있다. 우리 부족의 오아시스를 다른 부족원이 마시기만 해도 죽여버린다. 오아시스는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막 부족간에는 원교근공의 관계가 익숙하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금을 그어 사이가 좋지 않은 가까운 부족과 하나의 민족으로 묶여버리게 되었다. 단순히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차이가 있는 부족들이 하나의 국가고 묶여버린 케이스도 있다. 바로 이라크다. 

 

쿠르드족(빨강), 수니파(보라색), 시아파(초록색)

전 세계적으로는 수니파 90%, 시아파 10%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57개 국가 중에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4개국만 시아파가 다수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이슬람 국가에서는 수니파가 다수를 구성하기 때문에 시아파와 큰 갈등이 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 시아파는 수니파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강하다. 이유는 7세기, 현재 이라크내 시아파 지역인 카르발라라는 도시에서 대학살이 이루어지며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터키 제국에서 함께 살 때에는 술탄의 강력한 통제가 있을 때는 큰 갈등이 없었으나 이라크라는 나라가 탄생한 이후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이라크의 인구 구성은 시아파 60%, 쿠르드 20%, 수니파 20%이다. 그런데 수니파가 쿠데타를 통해서 왕조를 뒤집고 나라를 장악해버렸다. 그 절정이 사담 후세인(수니파) 시대였다.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가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숙청과 탄압을 이어갔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소수 수니파가 다수 시아파를 억누르며 이라크를 장악한 것이다.

 

시리아 내전도 마찬가지다. 시리아는 반대로 75%의 수니파가 소수 시아파의 변종인 알라위파(시리아 인구의 13%) 아사드 정부에게 탄압 당해왔다. 만약 국경선을 그을 때 알라위파 / 수니파 / 시아파 / 쿠르드족 분포를 기준으로 국경을 그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

 

좌측부터 레바논 / 알라위 / 수니 / 쿠르드 / 시아

 

국경을 그을 당시 유럽인들은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30년 전쟁이 끝난 이후 '국가'라는 것을 형성했다. 로마의 교황이 다스리던 제국을 해체하고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국가를 만들었다. 중동에도 그것을 전파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가'를 먼저 만들어야 더 이상의 갈등이 없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물론 이것은 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이었고 속내는 석유에 대한 이익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어찌됐건 100년 전 그들이 현대 중동을 형성하면서 그 시작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이 때문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하나의 국경 안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갈등이 100년간 지속되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중동은 오랫동안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 습성이 있다. 이를테면 스스로 이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슬람을 제외한 국가, 부족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막 유목민의 특성인 아샤비아(Asabiyyah)다. 연대의식을 뜻한다. 사막과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는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 어떤 영웅도 혼자 살 수 없다. 함께 살 때에는 귀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압도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라크 하나만 존재했다면 갈등이 어떻게든 해결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옆에는 이란이라는 큰 나라가 있다.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이라크내 시아파에 강렬한 메세지를 던진다. (언제까지 수니파에게 당하고 살꺼야?) 2020년 드론 폭격으로 사망한 이란의 솔레이마니가 그 역할을 했었다.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 뒤에 아랍국가들이 버티고 있다보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이 유대인과 아랍인의 싸움으로 갈등이 커져나간 부분이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다보니 아랍사회가 지속적으로 호전적이고 투쟁적인 그림을 그려온 것이다. 

 

중동의 분쟁이 글로벌화 되는 것도 문제다. 실제로 ISIS에 한국인 10대가 참여하기도 했다. 중동의 분쟁이 단순히 중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갈등이 중동이라는 약한 고리를 배경으로 드러나게 되고 젊은이들이 그쪽으로 휘말리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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