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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인남식 교수의 중동학개론 5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Varsika 2022. 3. 2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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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남식 교수의 중동학개론 5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화해할 수 없는 이유

*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3월 26일 방송을 참고하였습니다. 
* 포스팅 내용은 방송에 따르되, 일부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해 순서를 재편집하였습니다.
* 방송 내용 외에 추가한 내용은 별도 표시하였습니다.

 


- 건국 이후의 이스라엘
2천 년 동안 쌓여왔던 유대인의 회한이 건국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밀려 들어온' 유대인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 1930년대부터 유대인들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팔레스타인 거주자들로부터 땅을 구입해서 들어온 것이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위치도 예루살렘이 아닌 해안가와 갈릴리 호수 주변에 국한되었다.

 

Eretz Ysrael = Land of Israel의 확장


1947년 UN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분할하는 유엔 분할 결의안을 발표했으나 팔레스타인 측의 강한 반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이 되자 유대인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다. 이후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축출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전쟁에 참전했으나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에 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을 팔레스타인 전쟁 혹은 제1차 중동전쟁(1948~1949)이라고 한다. 


* 한국에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전쟁을 '중동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영문으로는 Middle East War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Arab - Israel War라고 표현한다.

* (추가) 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팔레스타인 내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스라엘 건국 전에는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를 통합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후 1967년, 3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서안 지구(웨스트 뱅크), 골란고원, 가자 지구까지 영향력을 확대한다. 그전까지 서안 지구는 요르단이, 가자 지구는 이집트가, 골란고원은 시리아가 관리하고 있었다. 이때 정해진 국경선 때문에 지금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대까지 점령했고, 당시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을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 이스라엘 정착촌의 건설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웨스트 뱅크 내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한다. 이는 명백한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전쟁으로 점령한 땅에 양국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민간인을 이주시키는 것은 국제협약 위반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정착촌들은 국제법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받지 못한다. Occupied territory(점령지)로 취급한다. 현대 국제법의 기본 규범은 Territorial integrity(영토 보전)으로 현재의 국경선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양국간의 합의가 되어야만 국경을 획정을 할 수 있다. 군인들이 점령지의 치안을 관리하는 것을 어쩔 수 없으나 국제법상 양국 간의 국경 합의가 되기 전에 민간인을 이주시킬 수는 없다.

 

Settlement : 정착촌 / Outpost : 전초지



이스라엘 정착촌에는 IDF(Israel Defense Forces, 이스라엘 방위군)이 들어가서 치안을 관리한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수천 년간 살아온 터전을 눈앞에서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정착촌 주변에서는 테러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일상의 영역에서 자신들이 빼앗긴 마을을 볼 수 있다. 유대인 정착촌과 팔레스타인 거주지가 물리적 장소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계속 아픔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기본적은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냉전이 끝나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냉전의 대결구도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하 이팔) 문제에도 관여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가까웠고,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와 함께 소련에 가까운 나라였다. 따라서 이들 간의 갈등은 냉전의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었다. 뮌헨 올림픽 검은 9월단 사건(1972년), 엔테베 사건(1976년) 등 냉전 시기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이팔 문제를 손보기 시작한다. 1991년 마드리드에서 평화회담이 열리고 이팔 양국의 대표가 만난다. 회의에서 큰 합의를 한 것은 아니지만 대화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냉전이 끝난 상황에서 미국이 이제 이스라엘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팔레스타인은 그들 나름대로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이스라엘의 우방으로 팔레스타인을 압박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평화회담은 시작될 수 있었다.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회담이 열린다. 오슬로 평화협정이라고 불리는 이 합의는 중동평화협상의 기념비적인 초석을 다진다. 이곳에서 양 당사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각각 분리된 국가로 천명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고수했던 하나의 이스라엘 정책을 포기한 것이다. Two states solution이라고 불리는 이 방안은 미국의 강력한 주장으로 관철되었다.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이 중재를 했고, 이스라엘의 라빈총리와 팔레스타인 PLO의장 아라파트가 양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라빈은 이후 이스라엘 내부의 시오니스트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는다. "네가 뭔데 야훼께서 주신 땅을 떼어주냐"

 

결국 1995년, 라빈 총리는 시오니스트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 내각은 해산되고 차기 총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는데 라빈의 후계자로 불리던 시몬 페레스가 낙선하고 젊은 정치인 네타냐후가 30대에 총리로 집권한다. 그는 보수 정치인의 수행 비서관을 역임했으며 미국내 네트워크(MIT와 하버드를 나옴)가 단단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네타냐후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집권했으며 이후 다시 당선되어 2009년부터 2021년까지 장기간 집권한다. 네타냐후의 등장으로 오슬로 협정은 동력을 잃게 된다. 



- 벤구리온의 트릴레마
오슬로 협정을 진행할 당시 이스라엘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건국의 아버지인 벤구리온이 주장한 3가지 원칙인 민주국가이며, 유대인 국가이며, 분할되지 않는 단일국가를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이스라엘 내부의 급증하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계 인구 때문이었다. 민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동일한 투표권을 주면 유대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위험하고, 이들의 투표권을 제한하면 민주국가를 포기해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 라빈은 민주국가이면서 유대인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땅을 분할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고 당시에는 환경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라빈의 입장을 현실주의적 입장으로 분류된다. 당시 이스라엘의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을 버리자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땅과 유대국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진보주의자들은 유대주의를 버리자고 했다. 그들은 미국을 예로 들었는데 앵글로 색슨이 미국을 세웠지만, 이후 다양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한 이들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아랍 학자), 다니엘 바렌보임(유대인 지휘자, 이스라엘 거주자는 아님) 등이 있다. 

 

- 두 개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Two states solution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이 독립해야 한다. 여기에는 크게 3가지 문제가 있다.

 

1. 이스라엘 정착촌

웨스트 뱅크 내부의 이스라엘 정착촌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두 철수해야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내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강경파들이다. 이들은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 이스라엘이 차지한 정착촌의 면적과 비슷한 크기의 땅을 팔레스타인에게 주는 Land-swap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착촌은 40~50년에 걸쳐 건설되면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가장 좋은 땅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땅을 이스라엘 영토에서 떼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오바마 정부 당시 이스라엘에 정착촌을 늘리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했으나 동결은커녕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가자 지구 정착민 퇴거 당시 반대하는 유대인 정착민들


현재 이스라엘 정착촌은 웨스트 뱅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 등에 분포되어 있다. 과거 가자 지구에도 정착촌이 있었으나 샤론 총리 당시 철수했다. 가자 지구에는 정착촌이 많지 않은 편이라 가능했다. 그러나그 당시에도 정착촌 거주자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 정착촌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언젠가 또다시 적들에게 쫓겨 디아스포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다. 결국 가자 지구 정착촌 퇴거에는 군 병력이 투입되었고, 항간에는 작전 책임자가 퇴거 집행이 끝난 이후 죄책감에 예편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착촌 철거 이후 가자지구는 일종의 해방구가 되어 하마스가 그곳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 이스라엘 공격의 거점이 되어버렸다. 

 


2.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장악하면서 이스라엘 국민이 된 팔레스타인 사람이 많다. 반대로 이스라엘을 거부하면서 제3국으로 떠난 난민들도 많다. 난민들은 특히 요르단으로 많이 넘어갔다. 한때 요르단 인구의 2/3가 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말도 있었다.

 

1970년 당시 요르단 국왕이던 후세인 국왕(사자왕)이 이 난민을 모두 수용해주었다. 무슬림 형제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르단 역시 서방의 지원이 없이는 나라 운영이 어려운 가난한 국가임에도 난민들을 대거 수용했다. 이후 요르단 내 난민들 중 극단주의 세력이 나타났고, 예루살렘 탈환을 시도하지 않는 요르단 왕정을 비판하며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요르단은 난민들을 조사해 극단주의 세력(PLO 등)을 모두 쫓아버렸다. 당연히 극단주의 세력을 쉽게 받아줄 나라는 없었고 결국 내란 중이던 레바논으로 대거 이주한다.

 

이후 레바논 내전이 심화되면서 레바논 내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헤즈볼라가 세력을 키운다. 이들이 레바논 내의 팔레스타인 과격 세력과 손을 잡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1982년 레바논 내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한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배후에서 지원 및 방호를 담당했고, 레바논 내 친이스라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

 

이 사건을 말미암아 아랍과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수치심 정도였으나, 이 사건 이후에는 이스라엘을 악마로 보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사브라 샤틸라 사건에서 약 45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으나 다른 통계에 따르면 무장하지 않은 양민만 약 3천 명 이상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 장관은 아리엘 샤론이었고, 그는 후에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다.(2001년~2006년) 그가 당선되자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중동 지역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많은데,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가 된다면 난민들이 대거 유입될 것이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것을 감당하기가 버겁다. 만약 유입된 팔레스타인 인구가 예루살렘 근처에 진을 치기 시작하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공식 입장은 단 한명의 난민도 귀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의 공식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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