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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파이아키아] 우크라이나 역사 총정리

Varsika 2022. 3. 1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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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사 총정리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 본 포스팅은 3월 12일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방송을 참고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위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이어 유럽에서 2번째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다. 또 19세기부터는 '유럽의 빵 바구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이는 우크라이나가 비옥한 곡창지대임을 뜻하는 것이다. 넓은 국토의 대부분이 경작이 가능한 평지이며 자연 재해가 드물다. 우크라이나의 국기 또한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옥한 땅과 푸른 하늘)

 

우크라이나 국기

 

우크라이나는 다민족 국가다. 우크라인이 80%, 러시아인이 20%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고, 드네프르강을 중심으로 친러시아 성향의 동쪽과 친서방 성향의 서쪽으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서쪽은 우크라이나 민족색이 강하고 역사적으로도 친서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현재 주요 전장이 있는 동남부 지역은 러시아인 인구비율이 높고 친러시아적인 색채를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키이우 루스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초로 만든 국가는 루스국이다. 과거에는 이 루스국을 '키예프 공국'으로 주로 불렀다. 공국이라 함은 나라의 군주가 임금이 아닌 공(작)이라는 것이다. 루스국이 처음 건국되었을 때에는 당연히 공국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스 공국, 키예프 공국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공국이 아닌 루스 '왕국'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과거 루스국의 군주는 '크냐지'라는 호칭으로 불렸는데 초기에는 이것이 왕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후 왕의 자식을 포함한 왕족들을 모두 크냐지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 중 일부는 공국을 세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어의 뜻이 변한 것이다.

 


우르크라이나가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보통 9세기 정도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역시 슬라브족으로 분류하는데 슬라브족은 크게 3가지 분류로 나뉜다.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동슬라브족에 속하고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가 앞서 언급한 루스국이다. 루스국에 대한 대략적인 역사는 다음과 같다. 6세기 경 3남 1녀 중 장남이었던 키이가 지금의 키예프(키이우)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게 되고, 사람들은 키이가 만든 도시, 키이우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가의 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키이우 루스의 세력권


 
이후 8~9세기에 걸쳐 노르만족 대이동이 일어난다. 지금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당시 동슬라브족들이 느슨한 부족연합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동남쪽으로 이동한 노르만족들이 부족연합체 내부로 포섭되었고, 그들의 주도하에 느슨한 정치연합체로서의 국가, 루스국(키이우 공국, 키이우 루스)이 탄생한다.


* 노르만족 대이동 :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지역에 살던 노르만족이 남쪽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 등 다양한 나를 건국한다. 노르만족들은 주로 발틱해를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9세기 형성된 키이우 루스는 13세기에 멸망하게 된다. 몽골제국의 유럽원정이 그 이유였다. 멸망 당하기 전에는 키이우 루스의 영향력이 아주 컸다. 그들은 스칸디나이비아 - 발트해 - 키이우 루스 - 흑해 - 동로마 제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몽골에 망하기 직전 키이우의 인구는 유럽 최대 수준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의 러시아도 키이우 루스(러시아어로는 키예프 루스)를 자신의 뿌리로 여기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역시 키이우 루스를 우크라이나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러시아의 생각은 러시아야말로, 키예프 루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국가라는 것이다. 키예프 루스는 13세기에 멸망했고, 한동안 그 지역에는 키예프 루스의 후계로 볼 수 있는 국가의 성립이 없었다는 것이다. 


* 키이우 공국 멸망 이후에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 ->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 -> 폴란드 순서로 지배하게 된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세력권



그러나 키예프 루스때부터 있었던 모스크바는 이후 그 명맥이 계속 이어져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고 나중에는 러시아가 되었다. 결국 러시아 입장에서는 동슬라브족의 정통성이 끊기지 않고 이어진 나라는 러시아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는 키이우 루스라는 명칭 자체가 키이우를 수도로 하는 루스국이라는 뜻이며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키이우이므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라는 입장이다. 또한 키이우 루스가 존재할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나라는 슬라브족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키이우 루스 멸망 후인 15~16세기였으므로 러시아는 키이우 루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국가아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동슬라브 국가인 벨라루스 역시 키이우 루스를 자신의 뿌리로 본다. 

 

 

 

코자크 시대와 페레야슬라프 협략

 

코자크(러시아 발음으로는 카자크, 튀르크어로 자유라는 뜻)는 15세기 형성된 군사공동체다. 키이우 공국이 멸명한 이후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은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다. 폴란드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을 장악한다. 당시에는 남쪽이 미개척지이자 변방이었던 셈이다. 폴란드의 농노제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들이 새롭게 터전을 마련한 지금의 우크라이나 남부는 크림 타타르라고 불리는 튀르크 계통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13~17세기에 걸쳐 크림 반도에 정착한 이들이다.
 
 
크림 타타르는 폴란드 남부를 침략해 개척 중인 농민들을 잡아다 노예(슬라브 민족의 어원과 영어단어 slave의 관련성)로 팔아버린다. 노예 무역이 굉장히 활성화되고 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게 된다. 당시 폴라드는 중앙집권적으로 왕권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기에 변방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렇게 결성된 군사조직이 바로 코자크였으며, 이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고 폴란드와도 60여년 간의 항쟁 끝에 독립된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키이우 루스와 코자크라고 생각하고 있다. 
 

흐멜니츠키


흐멜니츠키는 50살이 될 때까지 평범한 코자크였다. 폴란드의 귀족 영지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막내 아들이 살해당하고 재혼 예정이었던 결혼 상대인이 납치당한다. 흐멜니츠키는 여러 방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투옥당하게 된다. 결국 그는 탈옥하여 뛰어난 웅변술을 바탕으로 코자크인을 모아 반폴란드 봉기를 주도한다. 이후 폴란드 세력을 격퇴하고 코자크 국가 성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역사의 특징은 주변에 강대국이 너무 많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국가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코자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1572년 코자크 국가의 세력권


 
초기에는 흐멜니츠키의 선전과 코자크-크림 타타르 동맹으로 폴란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크림 타타르가 코자크를 배신하고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한다. 이에 코자크는 페레야슬라프 조약(1654년)을 체결하여 모스크바에 의탁하게 된다. 당시 모스크바는 몽골의 철수 이후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에 코자크는 코자크국이 모스크바에 의탁하는 대신 자치권 보장과 외세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역사에 두고두고 화근이 된다. 모스크바는 일련의 과정을 오래 전 멸망한 루스국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재통일한 것이라고 받았들였다. 그러나 코자크는 이를 단순한 군사동맹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흐멜니츠키에 대한 평가도 관점에 따라 아주 천차마별이다. 유태인의 입장에서는 학살자(흐멜니츠키는 유태인을 학살한 역사가 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자국의 붕괴를 초래한 배신자,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슬라브 재통일의 공헌자,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영웅이면서도 동시에 모스크바를 끌여들인 인물이라는 복잡한 평가가 공존한다. 페레야슬라프 조약 이후 모스크바와 폴란드는 전쟁에 돌입하고, 전쟁 끝에 협약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분할한다.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모스크바가 점령한다.
 

세차례에 걸린 폴란드의 분할. 키이우는 러시아 영토로 합병된다. 


이후 폴란드 역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가 차지했던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방은 오스트리아 20%, 러시아 80%의 비율로 분할된다. 이로부터 백수십년이 지난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우크라이나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서쪽 지방과 러시아가 지배한 동쪽으로 나뉘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이민족에 대해서 관용적인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를 맞게 되고 지금도 우크라이나 서부는 친서방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동쪽의 러시아는 철저히 이민족의 특수성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아직도 우크라이나 동쪽이 비교적 친러시아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공업국가로도 아주 중요하다. 소련 시절에는 철광 산업의 거점이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는 철광석이 많이 난다. 
 
미국에는 유태인들이 많은데 그들은 대부분 우크라이나계 유태인이다. 과거 신성로마제국을 위시로한 중부유럽은 반유대주의가 굉장히 강했고, 유태인들은 비교적 관용적인 정책을 펼치던 폴란드로 대거 이동했다. 폴란드를 거점으로 동유럽에 많은 유태인들이 퍼져 살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동유럽에도 반유대주의가 번져 이 때 동유럽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동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상도 우크라이나계 유태인이었다. 
 

 

 

크림 반도를 양도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이라는 나라가 탄생한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는 짧은 독립을 맛보는 데 후에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해 1921년이 되면 완전한 소련의 지방으로 편입된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지속적으로 수탈된다. 스탈린은 기본적으로 농민을 불신해 강제이주나 집단 농장을 만들기도 했는데 농업국가였던 우크라이나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스탈린은 1930년대 대기근 당시 우크라이나 곡물을 수탈해 모스크바로 보내고 심지어는 수출했다.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은 식량이 부족해 최소 300만 명에서 최대 1000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크림 반도의 위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는다. 그는 어린 시절 우크라이나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또 당시 불안하던 그의 권력에 처음으로 지지를 표한 곳이 우크라이나 공산당이기도 했다. 흐루쇼프는 서기장이 된 이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한다. 당시에는 정치적인 제스쳐이자 행정구역 재편 정도의 성격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페레야슬라프 협약 이후 300년이 된 시점이었는데 양국간의 우호의 성격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로 귀속된다. 그러나 이미 양도 시점에서 크림 반도 인구의 70%는 러시아인이었다. 이 때문에 크림 반도가 양국간 두고두고 화근이 되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 반도에 자치권을 주는 것으로 민심을 달래기도 했다. 러시아인이 워낙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가 강제로 크림 반도를 합병해 버린다. 당시 경제 통계를 보면 키이우 거주 우크라이나인과 크림 반도 거주 우크라인의 소득인 약 4배 가량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지역적으로도 키이우에 대한반감이 있었고, 이는 러시아가 손쉽게 크림 반도를 합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크림 반도는 면적 자체는 크지 않으나 러시아의 부동항 정책을 기준으로 보면 정말 중요한 곳이다. 이 때문에 터키와 크림 반도를 사이에두고 크림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얄타 회담도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개최되었다.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오렌지 혁명은 무혈 혁명이었다. 당시에 대선이 있었는데 친서방 후보(유센코)와 친러시아 후보(야누코비치)가 맞붙었다. 당시 현직 대통령은 2선 재임 중이었는데 우크라이나 헌법상 3선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패했던 당시 대통령은 헌법 재판소의 판결을 근거로 법을 어기고 3선을 추진했다 반대에 부딪힌다. 지지율은 5%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총리로 2선 후퇴하고 자신의 측근을 대통령 후보로 내보낼 계획을 세운다. 그 측근이 바로 도네츠크 주지사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친러시아)였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선거로 밝혀진다. 재투표 결과 유센코가 당선된다. 
 
그러나 국민적 지지를 받고 당선된 유센코도 우크라이나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능력부족으로 인해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후 2014년 두 번째 혁명인 유로마이단 혁명이 일어난다. 당시에는 부정선거로 퇴출되었던 야누코비치가 대선을 거쳐 대통령에 재임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면). 야누코비치 정부 이전의 친서방 정부에서는 EU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야누코비치는 그 과정 와중에 EU가입을 철회해버리고 결국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 

 

야누코비치 정부는 시위대를 대상으로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결국 시위는 더 격화되어 야누코비치는 해외로 도망가게 된다. 유로마이단 혁명 직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이후에는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는 돈바스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현직 젤렌스키 대통령은 6번째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이동진이 추천하는 우크라이나 역사책

 

1.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2.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3. 우크라이나 현대사(허승철)
4.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의 슬픈 운명
5. 러시아사(김학준, 장덕준 분담 집필)
 

 

이동진이 추천하는 우크라이나 역사영화


1. 대장 부리바(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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