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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중동평 8부 - 오스만 튀르크제국(1299~1453)

Varsika 2023. 4. 5.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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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이슬람 세계에 등장한 튀르크족은 1924년 공식적으로 칼리프제가 폐지될때까지 칼리프 자리를 장악했다. 셀주크 왕조의 군주였던 바이바르스(1223~1277)는 여전히 다마스쿠스 거리에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는 몽골의 침략으로 치명타를 입고 무너졌다.

 

셀주크 투르크(1037~1194)의 서진

 

 

셀주크의 본거지인 아나톨리아에 쳐들어온 몽골군 지휘자가 바로 티무르(1336~1405)였다. 유럽인들은 티무르를 타메를란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인으로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1405년 오트라르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곳은 과거 칭기즈칸의 상인들이 영주로부터 살해된 바로 그곳이었다.

 

 

1336년 일칸국(1259~1336)의 영토

 

▷ 티무르 제국은 1370년부터 1507년까지 존속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해체된 것은 그것보다 약 100년 앞선 13세기의 일이니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 부분은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셀주크 투르크는 티무르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12세기 제국내 분열을 겪고 있었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지게 된다. 이후 몽골군의 공격을 맞아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고 셀주크 투르크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일대는 몽골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일칸국이 다스리게 된다. 

 

티무르 제국(1370~1507)의 확장

 

 

티무르에 쫓겨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도망친 튀르크족은 현지에서 조그만 나라들을 이루면서 살게 된다. 그 가운데 동로마와 가장 격렬하게 싸운 나라가 바로 오스만에 의해 세워진 오스만 왕조였다. 오스만 1세(1258~1326)가 1299년 건국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 훗날에도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1300년의 아나톨리아 상황

 

오스만 1세에 이어 즉위한 오르한(재위기간 1326~1360) 역시 지속적으로 유럽을 공략하여 제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3대 술탄 무라트(재위기간 1359~1389)는 불가리아를 점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전쟁에 있어 개종한 기독교도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는데 그들이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이슬람 정예군이다. 예니체리는 터키어로 '새로운 군대'라는 뜻인데 강력한 단결력과 용맹을 자랑하며 이슬람 세계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4대 술탄 바예지드 1세(재위기간 1389~1402)는 발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1396년 코소보 전투에서 유럽 연합국을 격파했다. 연합군 6만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의 포로가 처형당했는데 이후 400년간 발칸에서 이슬람에 대한 저항이 사라지게 된다. 

 

1402년 동쪽의 티무르가 오스만을 공격하여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힌 10년 간 왕이 없었던 공위시대(1402~1413)를 겪었다. 아들 메흐메트1세와 뒤이은 무라트2세때 다시 힘을 회복하여 1451년 무라트 2세가 세상을 떠날 시기에는 과거의 영토릐 빼앗긴 영토를 대부분 되찾았다. 

 

1453년 정복왕 메트메트 2세(재위기간 1444~1446, 1451~1481)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공략하여 7세기 이래 난공불락이던 성벽을 허물어 점령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어 469년간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된다. 메흐메트 2세는 기독교 최초의 대성당이었던 아야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 역사에서 중세와 근세를 나누는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이때 이슬람군을 피해 도망친 그리스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사상을 서유럽에 소개하고, 이것이 르네상스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또 이슬람 세력으로 동방 무역이 막히자 유럽은 서쪽으로 눈을 돌렸고, 결국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메흐메트2세는 48세의 일기로 1481년 세상을 떠난다. 

 

 

메흐메트의 두 아들은 술탄의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였고, 오스만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스마일 1세가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샤라고 칭하며 1502년 사파비 왕조를 창업한다. 이후 1979년 호메이니 혁명으로 팔레비 왕이 폐위될 때까지 '샤'라는 칭호가 사용된다. 

 

 

1515년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터키 북동부 찰디란에서 격돌하였고 오스만의 셀림 1세가 사파비 군을 격파하였음에도 사파비 왕조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하여 결국 페르시아는 독자적인 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후 이란은 엄격한 시아파의 교리의 영향을 받게 된다. 

 

셀림 1세는 1517년 카이로를 정복하여 맘루크 세력을 초토화시켰으며,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여 성지의 수호자가 되었고, 인도네시아까지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이후 1520년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오스멘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1526년에는 헝가리를 점령하였고, 1529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빈은 기독교세계의 중심으로 이곳이 함락되면 전 유럽에 끼칠 영향이 막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빈 공략은 3주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8만 8천명 대군과 신성로마제국 연합군 8만 4천명이 격돌하였고, 오스만 군이 패배함에 따라 이슬람의 유럽 진출은 막을 내린다. 

 

한편 1405년 티무르가 죽은 뒤 1496년 그의 후손임을 자처한 무함마드 바부르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1496년, 1501년, 1510년 3번에 걸친 공격끝에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였고 이후 방향을 돌려 1520년 인도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는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힌두교도 연합군을 무찌르고 인도 땅에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니 이것이 바로 무굴제국이다. 1530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는 위와 같이 서술되어 있지만 다른 정보에 따르면 다르다. 바부르는 세 번에 걸쳐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빼앗기기를 반복했고 그의 근거지로 삼지 못했다. 그의 근거지는 초기부터 사마르칸트보다 남쪽에 있는 카불(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와 협력하며 힘을 길렀다고 한다. 그 후 동진하여 인도 북부에 있던 델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운다. 그는 사후에 카불에 묻혔다. 

 

 

인도 건축물의 최고라 불리는 타지마할이 바로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재위기간1628~1658)이 건설한 것으로 1631년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묘지이다. 이후 1658년 형제의 난 끝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오른 아우랑제브의 시대부터 무굴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힌두교도들이 끊임없이 무굴 제국을 공격하였고, 결국 1857년 멸망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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