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들/독서

최소한의 이웃(허지웅, 김영사)

Varsika 2023. 5. 2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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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기에 우연찮게 허지웅의 글이 자주 눈에 보였다. 언론에 보도된 것도 일부 있었겠지만 내가 본 것들은 주로 그가 SNS에 쓴 글이었다. 그다지 긴 분량은 아니었으나 읽으면 마음에 남는 것이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종종 그의 글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허지웅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글에서 이미 밝힌 바대로) 이미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이 산더미라 고민했다. 며칠 뒤 그의 글을 결국은 읽고 싶다는 마음에 도달해 구매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글의 밀도가 낮은 느낌이었다. 짧은 산문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그러겠거니 생각하고 몇 번 다시 펴보았지만 감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산문의 주된 주제가 위로, 희망, 부조리한 것들에 대한 비평인 탓에 비슷한 글이 반복하여 나온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책의 말미에 와서는 그래도 한 번은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 세상에 애초에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일이 훨신 더 많다. 규명할 수 없는 것에 매달려 있기보다 다음일을 모색하는게 언제나 더 현명하다.

  • 웃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웃을 때 어던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잊었을 뿐이다.

  •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눈 앞에 삶에 충실하기를

  • 도리라는 말의 쓰임이 왜 늘 양쪽이 아닌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인가.

  • 사람의 본질은 저지른 잘못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을 수습하는 방법을 정하는 순간 정해진다.

  •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다른 거짓말을 덧붙이면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얼룩진 괴물이 된다.

  • 의로운 자는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 짧은 삶 동안 완성에 이르렀기에 그는 이미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영예로움은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 극복의 경험은 재료일뿐, 그 자체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중요한 건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에 달려있다.

*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쪽수를 책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책등 쪽에 표기해두었다. 왜 그렇게 했냐고 따지고 싶다.

* 허지웅의 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아래 글이었다.


오늘자 sbs허지웅쇼 오프닝입니다. @woongshow103.5

언젠가 쇼핑몰에 갇혀서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려견을 키우는 등장인물이 밖으로 나간 자기 개를 구해야 한다며 함께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은 신경쓰지 않고 대문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쇼핑몰은 좀비로 가득차 버리고 맙니다. 참 비현실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의 광화문을 이보다 더 현실적이라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개월 동안 상인은 점포를 닫고 학생은 학교를 못가고 의료진은 격무로 탈진하고 예술가는 무대를 잃고, 집 안에 스스로를 가둔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토요일. 우리는 수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경찰을 폭행하고 기물을 파손하고 코로나에 걸리라며 침을 뱉고 밥을 나누어 먹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이들은 방역당국에 협조하지 말라는 문자를 돌리고 전염병은 가짜라고 말하고 혹은 누가 전염병을 고의로 교회에 뿌렸다고 말했습니다.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달 정규예배 이외 소모임과 식사를 금지하는 집합금지조치가 실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교회만 가지고 그러냐며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교계의 압력과 청원으로 이 조치는 2주만에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폭발했습니다. 광장에서 이게 얼마나 더 퍼졌을지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예고된 비극이었지만 법원은 막지 않았습니다. 둑은 터졌고 모두 잠기기 전에 물을 퍼내야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말입니다.

2천년 전 이웃을 네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라 말하고 다니다가, 그 이웃의 범주에 이민족과 죄인과 여성을 포함해 우리 편이 아닌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안 뒤 당황하고 분노한 자들의 무고로 살해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가 재림해서 너는 어떤 이웃이었느냐 묻는다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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