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 근현대사] 좌익의 근원(초기 한국공산주의 운동,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자유시 참변)

Varsika 2023. 8. 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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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의 근원

1. 해외에서 먼저 시작

2. 주요 계층은 양반층

 

□ 초기 한국공산주의 운동(해외, 1860-1925) :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기원 : 해외 1860년대 

* 한국 사회주의는 한국 이민사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연해주와 일본에서 한국 사회주의가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소셜리즘과 코뮤니즘이 달랐지만 우리는 그것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이주]

(1) 경제적 이유(1860년-1870년 대기근) * 1860년대 연해주 이민이 본격화되었다. 

: 아이훈(愛琿)조약(1858), 베이징조약(1860), 러시아 이민정책

아이훈 조약으로 연해주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공동관할 구역이 되고 2년 뒤 맺어진 베이징 조약으로 완전히 러시아 영토가 된다. 러시아는 아편전쟁에서 중국와 서구열강 사이를 중재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 

* 1840~1842년 1차 아편전쟁, 1856~1860년 2차 아편전쟁(러시아는 미국과 함께 영국을 지원했다.)

(2) 정치적 이유(1910년 이후)

*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소련 공식 출범

 

 

□ 초기 공산주의 두 분파

: 공산주의 세력은 초기 2분파에서 훗날 4분파, 이후에는 6분파까지 나뉘게 된다.

1. 상해파 - 이동희

- 하바롭스크 : 한인사회당(1918)

- 비귀하인(1900, 강제이주 선택 - 재산, 토지) : 조선으로 귀한 vs 러시아 시민권

* 상해파 역시 시작은 러시아였으나 3.1 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이동: 고려공산당(1921)

* 이동휘는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c.f)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가 많았고 세수가 적어진 일제는 러시아를 압박하였다. 그러자 러시아는 아예 이주한 조선인들을 귀화시키는 정책을 도입하였고 귀화하지 않은 이들은 하바로브스크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로 인하여 한인사회당이 생기게 된다. 이들은 재산과 토지를 버리더라도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2. 이르쿠츠크 파 - 남만춘

- 이르쿠츠크: 전로한인사회당(1919)

- 귀화인

 

* 코민테른과 두 분파

- 1917년 러시아 혁명(볼셰비키즘의 남하)

- 코민테른(comintern) 결성(1919.3), 상해파 이동휘와 접촉, 자금지원, 이르쿠츠크파 불만.

이르쿠츠파는 상해파를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 아닌 한국의 '독립'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도구로 공산주의를 이용한다고 비판함. 비귀화인으로 구성된 상해파는 민족해방운동에 중점, 귀화인으로 이루어진 이르쿠츠크파는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에 중점을 둠.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파가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이동휘가 먼저 코민테른에 접촉하였고, 코민테른은 동휘에게 지원금을 주었다. 그리고 이동휘는 이 자금을 들고 상해로 가게 된다. 이것이 결국 초기 두 분파의 갈등을 야기했다. 

 

(참고) 자유시(스보보드니) 참변(1921) -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군권 다툼에서 촉발된 유혈사태.

과거 자유시의 명칭은 알렉세예프스키였으나 1920년 적군(볼셰비키 정부군)이 백군(대항군)을 몰아내고 점령하였다. 이후 해방구의 의미를 부여하여 '자유로운'이라는 뜻의 스보보드니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참고 2) 코멘테른 지원 자금문제는 훗날 이동휘계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탈퇴하는 결과를 낳음.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받은 자금 중 일부를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나 이로 인한 알력다툼이 생겨 이동휘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함)

※ 코민테른은 소련 공산화 이후 전세계에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계급해방이었다. 

 

 

□ 상해파와 임시정부의 갈등(상해파 이동희 <-> 임시정부 이승만)

-. 이동휘(105인 사건, 계몽운동, 무관학교 출신, 함경도 출신) vs 이승만(문명개화파, 선교사 교육, 외교독립론, 기호성향)

이동휘는 연해주를 떠나 희망을 품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당시 임정의 수반이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코멘티른의 지원금을 임정으로 귀속시키기를 요구했고 여기서 비롯된 갈등으로 결국 이동휘는 임정을 나가게 된다.

 

초기 이승만과 이동휘의 만남은 좌우합작 정부의 탄생, 국내외 영향력과 권위가 절정에 달하는 황금기였지만 결국 그 시기는 1919년 11월부터 1921년 1월까지 1년 남짓 유지되었다.

(c.f) 이승만은 당시 갈등을 봉합하기 보다는 부각, 조장시키는 면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임정에서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당시 국내외적 인지도가 높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는 큰 이견이 없었으나 실제로 상해로 온 것은 임명되고도 한참 지난 날의 일이었고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 초기 상해임시정부(1919.11~1921.1)

- 이승만: 기호(경기+호서), 임시 대통령 격, 외교론(배재학당)

- 이동휘: 함경도, 무장투쟁론(사관양성소)

* 당시 좌우합작 정부로 국내외 영향력과 권위가 절정이던 시기

 

○ 초기 임정의 이념과 노선

1. 즉각적인 무장투쟁론 - 이동휘

2. 점진적인 실력양성론 - 안창호, 이광수 

3. 국제 정세의 변화를 활용하려는 외교론(워싱턴 구미위원부, 이승만)

 

○ 임정과 이승만

- 이승만은 상해로 부임하지 않음

- 구미위원부 중심으로 대미외교 활동을 펼침.

- 기호파 중심으로 임정을 운영하며 내부 분열을 조장한 측면이 있음

-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앙점이 되지 못하고 상징적인 가치만 남은 실체 없는 정부로 전락함.

- 이승만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반도 위임통치청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에서 탄핵됨. 이후 충칭 임시정부 시절 김구가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1941)에 임명하며 다시 관계가 재개됨.

 

(c.f) 이승만과 임정이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1945년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이승만이 임정을 시노리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오히려 한성임시정부를 더 지지했다. 애초에 상해 임시정부는 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햇고, 차라리 상징성 있는 한성정부가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임정으로 합류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이후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국채를 발행하여 활동자금으로 사용했다. 이후 다른 임정 재정도 사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임정이 내분에 쌓이게 된다. 

(* 한성임시정부는 실제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고 문서위주로 돌아가는 단체였다. 문서정부, 삐라정부라고도 불렸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최고위직인 집정관 총재를 맡았고 후에 안창호가 한성정부와 상해임시정부를 합치는 과정에서 상해 임정의 대통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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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조선공산당 창당(1925)과 해당 이후 한국공산주의 분파

☆ 조선공산당 창당을 계기로 해외에서 시작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이 비로소 국내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 한국 공산주의의 또다른 특징은 그다지 노선갈등이나 이념갈등이 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본론을 읽고 이념과 노선에 대해 논쟁하기 보다는 과거 천주교를 받아들이듯이 종교처럼 받아들였다. 

 

○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계보

1. 상해파 -> 서울파 -> L.L파

2. 이르쿠츠크파 -> 신사상연구회 -> 화요회

* 화요회는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라 그렇게 이름 붙였다.

 

3. 북풍회(일본 유학생) -> 북풍회(일원회) -> M.L 파(엠엘파, 마르크스-레닌파)

* ML파와 LL파 모두 이름에서 이념을 뜻하는 부분은 적고 단순히 멋으로 지은 면이 있다. 

 

○ 조선공산당 창당과 붕괴(1925-1928)

상해파의 후신, 이르쿠츠크파의 후신, 북풍회의 후신이 그대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성격이 다른 집단들이 모였음으로 단체 안에 세력 갈등과 분파주의가 여전했다. 

 

- 1차 조선공산당: 김재봉(안동 김씨)

- 2차 조선공산당: 강달영(김재봉의 고향 후배)

- 3차당 : 신간회(부르주아 민족주의 + 공산주의)

- 4차 조선공산당: 차금봉

(c.f) 조선공산당 내 청년조식이 고려공산 청년회.

 

○ 1차 조선공산당(1925.4.17) 창당

- 서울파, 화요회, 일원회 해외 분파의 연합

: 당조직 화요회 주도

: 중앙집행위원회 균등

- 당비서(책임비서): 김재봉(안동, 화요회)

- 고려공산청년회(청년조직): 조봉암, 박헌영(이르쿠츠크파)

- 조봉암, 박한영: 동방공산대학 동문 *조봉암 vs 박헌영

*박헌영은 훗날 남로당 대표가 되고, 조봉암은 훗날 박헌영과 공산당을 비난하며 진보당을 창당한다. 조봉암의 경우 조선공산당 내에서는 활동이 미미한 면이 있다. 

 

○ 1차 조선공산당 활동

- 공산주의 진보사상

: 하나의 정치원리 x, 공산주의 이론체계 x. 혁명적 행동을 수행함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미숙함으로 인하여 혁명투쟁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 조선공산당의 성공적 활동 x

: 혁명투쟁에서 취약함과 미숙함. 전략과 전술에 대한 훈련부족, 애국적인 조급함(젊은 공산주의자들)

 

○ 1차 조선공산당의 붕괴(1925.12) * 그해 4월 설립되어 8개월만에 붕괴

- 전조선노동자 적기(赤旗) 사건. "조선공산당 만세" - 마치 잡아가라는 식의 미숙한 반응

- 1925.11.22. 신의주 일본인 경찰간부 동행 지방변호사와 충돌, "한국공산주의 만세"

- 상해 여운형 - 박헌영 간 편지 발각

* 일련의 사건에 대한 당내 책임론(화요회 → 서울파, 북풍회)

- 일본: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공산주의 활동 감시 강화

- 당 중앙집행위원회 대부분 검거, 붕괴

- 김재봉 체포(1925.12.19)

 

○ 2차 조선공산당(1926년 2월 ~ 7월)

- 당서기: 강달영(안동, 화요회), 김재봉 임명

- 고려공산청년회: 박헌영 → 권오설(안동)

- 강달영: 분파투쟁 합작 타협 시도 x, 문화적 민족주의 타협 시도, 당의 반발. 강달영의 지도력 문제

* 중국이 1924년부터 1927년까지 1차 국공합작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한 다음 일시적으로 효과를 본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 권오설 주도 순종 장례식 시위(1926.6.10).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공산주의 만세, 강달영 체포(1926.7.17.), 화요회 지도권의 종말

 

○ 3차당과 신간회(1927.1.14.)

- 일월회: 방향전환, 공산주의 신노선 제안

* 북풍회 -> 일월회 -> 정우회

- 정우회 선언(1926.11.15.)

: 소규모의 경제투쟁에서 광범위한 정치투쟁으로 전환

: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 조직

- 신간회(1927-1931):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연합

 

- 목적

(1) 공산주의: 모든 분파를 망라하는 혁명조직 설립

(2) 부르주아 민족주의 : 정치적 자치

* 신간회 내의 공산주의 주도권 상실

 

○ 4차 조선공산당(1927.2.27. - 1928) * 4차 조선공산당은 일본 유학파 중심. 

- M.L파(마르크스-레닌주의) 주도(일본 유학파)

- 당서기: 차금봉(노동자 지도자, 노동공제회 - 사회주의잡지)

- 고려공산청년회 위원장: 김재명

- 신간회 영향력 상승(1928년 말): 세포조직, 근우회(여성중심, 김활란)

- 학생운동에 중점

- M.L당 사건(1928.10.5.)

: 약 175명 체포, 차금봉과 김재명의 체포와 옥사. 이후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됨. 

 

○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과 실패(1928-1931)

- 5차 조선공산당: 김철수

- 6차 조선공산당: 한위건

상기 2건 모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와해되고 말았고, 그 이후에는 코멘테른의 정책에 의해 조선공산당 설립 시도가 사라지게 된다. (1국1당 당원칙) + 만주사변으로 인한 준전시체제 돌입, 1925년 발표된 치안유지법에 따른 경찰 탄압 증가  

 

○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1860년 ~ 1925년

: 해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2. 1925년 ~ 1928년

: 국내, 조선공산당(1차 ~ 4차)

-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후에 중국공산당 만주총국으로 흡수된다. 

-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후에 일본공산당으로 흡수된다. 

 

3. 1928년 ~ 1931년

: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5차 ~ 6차)

 

4. 1931년 ~ 1945년

: 해외, 중국공산당(만주, 연안), 일본공산당

- 1930년대 코민테른 1국1당 원칙(1928년 발표)

- 만주사변으로 인한 준전시체제, 경찰의 탄압 강화

* 김일성 : 중국공산당 만주게릴라부대 소속(조선공산당과는 관련없음)

 

□ 해방 직후 한국 공산주의 분파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지가 연안(옌지)이다.

(1) 국내파(조선공산당) - 박헌영

*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당수였는데 훗날 남로당 운동을 전개하다 이승만과 미군정에 쫓겨나 월북한다. 이후 6.25를 촉발하는데 역할을 하기도 한다. 

(2) 연안파(*연안은 모택동의 근거지다. 연안파 = 화북조선독립동맹 = 조선의용군, 조선신민당 - 김두봉)

* 모두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계보(1860)

 

* 조선의용군과 조선의용대(김원봉)는 다르다. 

-. 조선의용군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재편한 조선독립동맹의 항일투쟁군.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본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자 화북지대에 남아있던 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재편한 것이다. 1943년 1월 이후 중국 팔로군에 편입되었다.

-. 조선의용대 : 김원봉(연안파)을 중심으로 1938년 10월, 중국 한커우(지금의 우한)에서 결성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장제스로부터 최초로 인정받은 조선인 무장부대

 

(3) 소련계 한인 - 허가이(소련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전쟁떄 소련이 끝내 참전하지 않아 숙청당했다.)

(4) 만추빨치산(동북한일연합군, 갑산파) - 김일성. 갑산은 함경도에 있는 지명이다. 갑산파는 훗날 북한내 최고 권력을 갖게 된다. 

 

○ 해방이전 김일성 주요 경력

- 1912년 평양 인근 만경대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를 나와 중국어가 유창하였다. 1926년, 중학교 재학 중에 공산주의 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부터 40년까지 중곡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합군 소속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말 김일성의 부대는 소련 국경을 넘어 소련 기지 내의 조중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하바롭스크, 브로실로프에 각각 기지가 있었음). 1942년 6월 소련 극동 25군 88특별여단으로 재조직되었으며 1945년 8월 소련군과 더불어 북한에 입성했다. 

* 연도에 대해서는 정확성 이슈가 제기되고 있음

* 북한 내에서는 중국학교를 다녔다는 점(다만 중국인 학교라기보다는 외국인 학교의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음. 중국학교를 다녀 중국어에 유창함), 중국공산당 내 유격활동과 소련 극동군에 편입되었던 점을 우상화 때문에 언급하지 않고 있음. 실제로 1960년대 이후 발표된 자료는 우상화 작업으로 인하여 신빙성이 떨어짐. 

 

-. 김일성에 대한 논란

1. 김일성 가짜설 - 명성에 비해 너무 젊다.

2. 항일운동 경력 - 과장되었다.

3. 소련군과의 관계
4. 중곡공산당원 경력

* 광복 후 소련은 김일성이 아니라 조만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평양시민대회 때 조만식이 김일성을 대중에 소개했다. 이후 김일성은 점차 자신의 입지를 확대해 나갔다. (소련이 세운 꼭두각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

 

-. 1960년대 북한이 김일성의 해방 이전 항일운동 경력을 내세우자 남한은 국가우너수의 정당성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에 따라 김일성 가짜설과 소련 꼭두각시 설을 유포한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남북교과서 모두에 실리지 않았다. 

 

□ 해방 이후 주요 지도자: 조봉암 vs 박헌영

- 공산주의자 동지, 친구

- 결별: 박헌영 비난, 당 탈당

- 조봉암의 사상전향, 1946년 6월 12일 구속, 6월 22일 석방.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인터뷰에서 박헌영을 비난하고 공산당을 탈당했다. 

 

- 박헌영: 남로당(남조선노동당, 46.10.16.)

- 조봉암: 진보당(1956.11)

 

○ 조봉암 vs 이승만 / 이승만의 반공주의: 정적타파

- 조봉암(진보당) vs 이승만(자유당)

 

-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 조봉암(진보당추진위원회) vs 이승만

: 평화통일론 vs 북진통일론

- 진보당 사건: 1958년 1월 간첩혐의. 1959.7 재심기각,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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