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좌우익의 기원과 계보 #1 한국민족주의 분열: 3.1 운동 이후

Varsika 2023. 10. 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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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의 두 국가 탄생

해방 이후 남한에는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북한에는 소련 점령기를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련 점령기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실제로 미군정은 공식 정부로 활동하였으나 소련은 점령만 했을 뿐 공식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열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 3.1 운동 이후 한국의 지적 계보

3.1 운동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방식과, 해방 이후 조국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엇다. 여기서 발생한 의견 대립에 따라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에서 시작된 첫 번째 분파인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민족개량주의, 실력양성주의, 문화적 민족주의, 점진적 민족주의, 타협적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이들은 해방 이후 우익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들을 부르주아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프롤레타리아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개념을 가져와 부르주아 민족주의라 칭한 것이다.  (ex) 이광수 - 민족개조론. 민족개조론은 일제의 침략을 일정 부분 정당화하는 모습이 있다. 

 

이들을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동아일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지칭해 '문화운동'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마이클 로빈슨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문화적 민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문화운동의 사례로는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건설운동 등이 있다. 

 

두 번째 분파인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은 급진적 민족주의, 비타협적 민족주의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좌익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무력사용을 지지했다. (마르크스 역시 혁명을 위해 폭력을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에 나선 다수의 인물이 사회의자였다. 이들은 내셔널리즘이라는 큰 개념 아래 자리잡은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만주 빨치산으로 활약한 김일성 역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특징은 해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초기에는 우익과 좌익 중 좌익이 더 큰 지지를 받다가 후에 반탁운동을 기점으로 전세가 역전된다. 이는 후술한다. 

 

○ 이념의 담당자층

문화적 민족주의는 주로 서얼과 중인들이 참여했다.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며 지방에서 향리 등을 지낸 자들이 주 구성원이었으며 이들은 훗날 한민당을 창당한다. 이는 망국 이후 이들의 신분적 콤플렉스를 조장해 일제가 이용했기 친일세력화하는데 이용했기 때문이다. (collaborator).

 

반면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에는 대부분 양반 출신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훗날 조선공산당 계열을 창당하는데 만주 빨치산계인 김일성과는 관련이 없다. 김일성의 세력은 대부분 양민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후에 갑산파를 구성한다. 

 

 

○ 좌우익의 기원: 1910년대 무단통치와 3.1운동

-. 1910년대가 되면서 공식적 식민시기(formal colony)가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협력자'를 구하지 않았다. 조선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를 '조센징'으로 경멸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3.1운동의 촉매제가 되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모두 동질적인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갖고 동참하게 된다. (3.1운동 최고의 민족주의적 성취)

(c.f) 비공식적 식민지(informal colony) 시기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당했으나 형식적인 최종 결제권자는 조선의 왕이었다. 

 

-. 1945년 이전의 일본의 식민지

1) 대만(1895)

2) 가라후토(남사할린, 1905, 북위 50도를 경계로 함)

3) 남태평양군도(1차 세계대전 이후) * 비공식적 식민지

4) 만주국(1932) * 비공식적 식민지. 영토를 일본제국에 병합하지는 않았다. 

* 비공식적 식민지는 유지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 조선: 2단계 식민지 과정(비공식적 제국 -> 공식적 제국)

1) 왜 비공식적 제국을 유지하지 않았는가?

을사오적이라는 협력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너무 소수였다. 근대적인 관료체제에서 조정 관리들의 허가를 받기에는 친일파가 너무 소수였다. 그래서 의결 과정상 비공식적 제국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의병과 같은 지속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2) 왜 애초에 공식적 제국으로 병합하지 않았는가?

 

-. 협력이론

협력이론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지내 협력자를 반드시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억압을 하면 식민지가 유지될 것이라 오판했다. 

* 비공식적 제국에서 공식적 제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민족주의가 성장하게 된다.

 

○ 우익의 기원

-.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 분리해서 통치한다.

문화통치는 지배층 내에서 협력자를 구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 한국 민족주의의 분열을 야기하는 정책이었다. 일제가 식민지내 협력자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3.1 운동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인' 정체성 형성과 민족주의 운동

단군의 후손으로서 동일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의 성장, 신채호 선생이 '아와 비아의 투쟁' 등. 내부의 단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남성과 여성, 기호 &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 등 분열된 내부의 합일이 필요했다.

 

-. 범아시아주의(인종적 민족주의)  vs 민족주의(종족적 민족주의)

당시 한중일 3국 모두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비공식적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 내에서는 해당 이념이 호응받지 못했다. 거기다 일제가 동질적이지 않은 조선 내부의 집단을 모두 조센징으로 경멸하면서 민족주의가 일어났고, 이는 역으로 저선인이라는 민족주의 의식 고양으로 이어졌다. 식민지를 하나의 균일적인 사회로 인지한 것은 일본의 실책이었다. 

 

-. 3.1운동의 성공과 실패

3.1운동은 일제츼 통치방식 전환을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서구 각국의 관심을 얻지 못한 면에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후 한국민족주의의 분열이 일어난 점 역시 아쉬운 점이다. 실제로 일제의 문화통치 이후에는 과거 3.1운동과 같이 전반도적인 전민족적인 해방운동이 국내에서 전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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