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 근현대사] 해방, 광복: 연합군의 승리와 미국의 대한정책

Varsika 2023. 10. 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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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과 광복

-. 해방: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 광복: 암흑의 세계에서 빛을 찾았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근대 임정도 모두 공화국을 지향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왕정 복귀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따. 

 

 

해방: 수동적 독립

-. 2차 세게대전의 종식 -> 연합군의 승리 -> 일본의 패망 -> 일본 식민지의 자동적 해방

-. 연합군 한국문제 개입권한 -> 분단의 기원 + 미국의 대한 정책

 

○ 미국의 대한정책

미국의 대한정책은 1943년을 기점으로 나뉠 수 있다. 43년 이후에 한국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미국은 한국문제를 일본의 내정문제로 간주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뒤통수를 맞은것이다. 1905년 8월, 미국에 외교관 자격으로 방문한 이승만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미 한달 전인 같은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 밀약이 1924년 공개될 때까지 이승만은 미국의 이중플레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 2차 세계대전, 정확히 말하면 진주만 사건 이후 미국은 한반도를 미국안보의 요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소련이 견제하면서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 미국중심 연합군의 한국문제 논의

1) 다국적 신탁통치

-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한국, 인도네시아의 전후 신탁통치를 1943년 3월 24일 제안한다.

- 중국, 미국, 소련을 신탁통치국으로 구상했다. 

이를 루즈벨트의 국제주의라고하는데 어느 국가 혹은 지역에 대한 단독지배에 반대하고 일련의 상호협정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것이 그 목표다. 

2) 유엔을 통해 미국의 정치적 목적 달성

3) 점령

 

한국에서는 결국 3번째 점령이 결정되었고, 이는 분단으로 이어진다.

 

○ 한국 독립에 대한 논의

1) 카이로 회담 1943녀 11월

: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질, 중국 장제스

'적절한 시기에', 신탁통치 구성 반영, 독리벚ㅇ부 유지 능력 없음, 스탈린 동의

 

2) 얄타회담 1945년 2월

: 유럽 연합국 반대(영국),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

신탁총치에 대한 분명한 합의 없음

 

3) 포트담 회담 1945년 7월

연합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공동행동 합의를 최대 목표로, 최소한 카이로 선언을 지지한다는 목표하에 모임. 루즈벨트는 국제주의적 구상을 통해 소련을 영-미 동업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그의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평화유지를 위한 책임도 맡기는 것을 구상함.

 

○ 38선

38선은 얄타 회담에서 처음 논의 되었고, 미국의 안건이었다.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자치능력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였고 한반도가 소련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이 경우 중국과 일본도 공산화될 우려가 있음) 신탁통치안을 바람직한 방안이라 판단하지만, 미국의 발언권 확보를 위해 한국의 일부 혹은 전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자는고 결정함. 

* 미군의 한국 진주 구상(미국무성, 44년 3월)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결정(45년 8월 10일 ~ 8월 11일)

 

○ 소련 붉은 군대의 북한 지역 진주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

8월 9일 만주 관동군 공격

8월 12일 경흥, 웅기, 나진항 진주

8월 23일-26일 평양 점령

 

소련은 북한을 점령하였지만 직접 통치하지도 않았고 현지 토착 세력을 우대하지도 않았다. 이는 코민테른 시절부터 한국계 공산당과는 크게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었다.소련은 대신 북한의 거물이었던 조만식과 접촉하였고, 이후 김일성을 지지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북한의 토착 공산주의세력과 경쟁에서 이긴 김일성의 생존력을 엿볼 수 있다. 소련 점령 이후 북한 각 지역에는 주민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가 생겼고, 인민위원회가 각 지역을 통치하게 하였다.

* 소련의 북한 점령 정책은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호의적으로 볼 부분이 있다. 

 

○ 미군의 남한 진주

미국의 대한정책은 소련을 의식해서 변화했다. 한반도 국내적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우세한 점, 민족해방운동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기여도가 높은 점 등을 고려하였고, 중국 공산화가 진행되는 것을 목격한 후 한국을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한다.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가 사망한 이후에는 신탁통치 및 국제주의적 구상이 퇴조하였고, 군대를 급파하여 점령하는 것으로 정책이 변화되었다. 

* 다만 대한정책의 변화 부분은 하나의 수정주의적 해석이다. 미군정 이후 미군이 철수한 것을 볼 때 정말 한국을 전략적 교두보로 생각한 것인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은 존 리드 하지로, 그는 아시아 문화 정치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단지 그가 오키나와에 주둔해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근접하였기에 파견되었을 따름이다. 하지는 일본 통치자와 우호적 관계가 있었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을 때에도 우호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분단의 책임은 미국에게도 어느정도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특히 미군의 남한 진주 목적이 미국의 안전보장에 부응한다는 점, 미국의 통상 및 후견으로 개방한다는 것, 공산주의 및 반식민 혁명을 억제한다는 내용은 수정주의 관점 중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다. (스탈린 문서 공개로도 깨지지 않은 부분)

 

반면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시각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그닥 확고한 정책 자체가 없었다는 점, 미국은 중국의 상황에 따라 간을 보고 있었다는 점, 그에 반해 소련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북한을 편제하였고, 이후 적화통일을 시도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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