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 근현대사] 미군정체제와 정책(1945-48)

Varsika 2023. 10. 1.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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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경찰, 군대 제도와 점령정책 - 미군정 시대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이승만 정부는 이것을 물려받게 되었나?

 

1) 식민관료체제 부활

기존 일제의 중앙집권적 체제: 통제와 지배에 극히 능률적인 총독체제 상하관계

 

미군이 진주한 이후 기존 관료의 90%가 이탈하자 미군정은 관료체제 자체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총독부 관리 혹은 한민당 출신을 중용했다. 미군은 주요 요직에 좌익을 배제하였고 특히 폭력수단을 독점하는 자리에는 우익을 배치했다. (조병옥 - 미군정 경무부 부장, 장택상 - 수도경찰청장)

 

2) 법제도

일본의 법률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 21호를 발표하여 그해 8월 8일까지 유효했던 것은 합법적이며 당국에 의하여 폐기되기 전까지 계속 발효한다고 발표했다. 특히 1925년 발표되었던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이후에도 유지되어 좌익 단체를 탄압하는데 활용되었다. 

 

3) 경찰제도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경찰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고 단일 관료집단으로는 한민당과 함께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식민지 시대 일본 경찰의 기능과 권력범위는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이었는데 이러한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반대파에 대항할 대중적 기반이 없던 우익에게는 불가결한 자원으로 활용된다. 

 

미군정 책임자 하지 역시 경찰제도의 부활을 결정했고, 이는 결국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식민관료체제의 완전한 부활을 의미했다. 이승만 역시 정치세력화를 위해 한민당과 친일경찰 세력을 흡수하게 된다. 

 

○ 미군정과 국립경찰

미군정은 과거 한인경찰을 다시 대거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일제시기 일본 경찰에서 근무하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대거 이탈했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일제치하 친일 세력이라는 콤플렉스로 인하여 자신들을 축출할 수 있는 집단의 집권을 막아야한다는 공통적 이해관계로 뭉쳤다. 미군정 역시 이들이 일본에 충성했듯이 미군정에 충성할 것이라고 믿었따. 

 

한민당의 조병옥은 국립경찰만으로 인공과 인민위원회의 해체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군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 유일하게 집결된 힘의 도구로 국립경찰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모든 정치적 행위와 언론, 파업과 종교적 행위까지 전방위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 군사영어학교(육사의 전신): 장교 양성을 위해 설립했으나 이 역시 1945년 12월의 일이었고 1945년 기준 한인 군대는 창설되지 않았다. 

 

(c.f) 독립운동가들은 행정과 같은 경험이 전무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좌익 세력은 국외 거주자가 많아서 국내에서의 행정 경험이 전무했다. 반면 우익 세력은 미국 대학을 나온 경우가 있어 유창한 영어를 사용하였고 이점이 미군정에 등용된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 조선국방경비대(한국군의 전신)

미군정은 경찰만으로는 치안유지에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1945년 10,월 국립경찰을 지원할 보조부대로서 국방경비대 창설을 기획했다. 인공의 사설 군부대(국군준비대)가 위협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 11월, 군정법령 제 28호를 발표하여 국방부 설치를 공식화 한다. 이듬해 1월 20일 미군정은 모든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을 반포한다. 30여 개의 사설 군사단체가 해체된다. 이들 대부분 우익 조직 경비대에 입대한다. 이들의 훈련은 군사영어학교에서 담당했다. 여기에는 일본군 출신, 관동군 출신, 광복군 출신이 모두 섞여 있었다.

 

광복군 출신은 대부분 국방경비대 가입을 거절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입대했다 하였더라도 투옥경험에서 1차적으로 검열되었을 확률(미군정은 미군정 기간동안 투옥경력이 없는자에게만 입대 자격을 부여했다.)이 있고 정규훈련 경험이 미미하여 고위직까지 승진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하여 결국 한국군 창설과정에서는 친일 협력자가 민족주의자로 둔갑하는 일이 발생한다. (박정희 등)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의 성격이 강했고, 국경을 방어하는 훈련보다는 폭동 진압에 중점이 있었다. 국방경비대는 체포권이 없었으나 실제로는 제못대로 체포하고 영장없이 수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 미곡정책(경제 운영 실패)

하지 중장은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도입하였는데 이것이 결국 (매점매석으로 인한) 인플레를 양산했고, 46년 초 기근이 겹치면서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미군정은 일본식 농업 관리제도인 공출제를 부활시켰고 결국 국립경찰이 쌀을 수집하면서 식민기구적 기능이 부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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