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 근현대사] 이승만의 등장과 대한민국 건국

Varsika 2023. 10. 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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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귀국

이승만은 1945년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와 만남을 가진 뒤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좌우익 단결을 기치로 내걸었다. '덮어놓고 뭉치자'. 이후 10월 20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촉한다. 

 

○ 임시정부 인사 귀국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에, 그외 인사들은 12월 2일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따. 이들은 귀국후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원동원 중앙위원회를 발촉한다. 후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는 연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을 결성한다. 

 

상해 임시정부시절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좌우익 연합 정부로 기능하였으나 이후 파벌이 발생하였고 1925년 이승만까지 탄핵 당하면서 임정과 이승만은 별결하게 된다.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이후에 김구가 이승만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했고 1941년 6월, 그를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하면서 대미교섭의 전권을 위임하게 된다. 

 

○ 모스크바 삼상 회의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만나 전시의 협상에서 미결된 문제를 톤의한다. 이들은 이후 모스크바 협정을 발표하는데 여기는 한국에대한 최고 5년간에 걸친 4개국 신탁 통치 규정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였고소련은 신속한 독립을 주장하였다. 다만 소련의 신속한 독립은 한반도에 위성국을 세우려는 계획의 일부였다는 설이 있다.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 

 

모스크바 협정의 내용은 국내에 오보되었고 소련이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강조한다고 소개되었다. 김구는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며 반탁운동을 시작했고, 이승만과 한민당 역시 반탁 운동에 돌입한다. 특히 한민당은 신탁통치를 피할 수 있게끔 한민당 뒤에서 뭉치자고 대중에게 호소했다. 한편, 미군정의 하지는 신탁통치보다는 점령정책이 조속한 해결을 위해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한민당은 선전부와 간행물을 통해 소련의 신탁통치 의사를 강조하고 남한의 좌익 세력을 소련과 결부시켜 반한국적인 음모를 지닌 외래 주구로 매도했다. 좌익은 입장을 변경하여 1월 4일, 신탁통치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모스크바 협정의 전문(全文)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우익은 이러한 삼상 결정에 대한 지지 역시 찬탁운동이라고 매도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박헌영은 1946년 1월 6일 기자회견을 열었고 뉴욕타임즈 기자 존 스톤은 그가 소련 신탁통치와 더불어 소련 연방 가입을 주장했다고 보도하면서 신탁통치에 대한 분규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 미소 공동위원회

1) 예비회담 1946.1.16 ~ 2.5

- 모스크바 협정

- 미 자유시장체제 실패 -> 쌀 공급문제로 교착

 

2) 1차 미소공동위원회 1946.3.20

-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한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어떤 한입 집단과 협의할 것인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음. 5월 1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

 

3) 2차 미소공동위원회 1947.5.21

- 반탁 운동가들을 정부에 포함시키려하자 소련이 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이어 2차때에도 반대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가 급서햇고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반소반공 노선을 분명히 했다. 루즈벨트의 국제주의가 대소봉쇄전략으로 바뀐 것이다.

 

○ 좌우익 대립

우익은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할 비상정치회의에 들어간다. 이 조직은 미군정의 자문위원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조직으로 말미암아 우익은 하나로 통합된다. 비상국민회의 세력은 훗날 민주의원으로 이어진다.

 

좌익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한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미군정이 인정한 민주의원(1946년 2월)에 대항 조직이자 정당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민족전선의 대표)과 허헌, 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임민당의 여운형, 조선심민당의 백남운 등이 소속되어 있었따. 이들은 북한과의 별개로 남한 좌파의 토착 세력이었다. 그러나 정책 수습과 통찰력에서 부족함을 보인다. 

 

-. 민주의원

우익 기반의 하지 자문기관이었다. 모든 주요 정당들의 연합체였으며 미군이 민주의원을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단독정부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산물이 되어야 할 임시정부가 이미 그 전에 구성되었음을 시사하며 이들은 1946년 2월 14일 첫 회의에서 인공 출신 지도자를 배제하자는 데 합의한다. 이들은 과도입법의원 창설까지 영향을 끼친다.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 입법기관 창설로 1946년 10월 선거를 통해 12월 12일 입원의원이 개원하였다. 이 역시 남한 단독 정부를 에고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은 지방순회 중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를 주창한다. 

 

○ 좌우합작 위원회 1946년 여름

미군정 주도하에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목표로 한인 정치 지도자들 사이의 협의가 주선된다.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한 우파, 박헌영 중심의 좌파, 여운형, 김규식 중심의 중도파들이 모였고 미군정은 중도파를 지지하였다. 하지 역시 공식적으로 좌우합작 노력을 지지하였는데 (6월 30일), 좌우합작 위원회는 같은해 7월 22일 첫 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되면서 동력을 잃기 시작했고, 이승만이 좌우합작에 반대해 민족통일 총본부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 단독정부 수립과정

1) 군정법령 제 28호(45.11.13)

2) 민주의원(46.2)

3) 남조선과도입법의원(46.12)

4) 남조선과도정부(47.6.3)

5) 유엔 총회는 남북한 총선거 결정(47.11.14)

6)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남한 입국, 북한 입국 거부(48.1.8)

7) 유엔소총회 남한 단독 선거안 통과 (48.2.26)

8) 5.10 선거 반대 운동, 제주도 4.3

9) 5.10 남한 단독선거 실시

10) 제헌국회 국호 대한민국으로 결정(48.5.31)

11)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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