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좌우익의 기원과 계보 #2 문화통치와 문화운동

Varsika 2023. 10. 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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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통치는 헤게모니 지배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문화통치 기간을 거쳐 한국민족주의는 문화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분열되었고 민중은 3.1운동과 같은 활발한 운동을 다시 전개하지 못했다. 

※ 헤게모니: 이탈리아 공산당원 안토니오 그람시가 개념을 정리하였으며, 그는 헤게모니를 '지적, 도덕적 지도력에 의한 자발적 합의'를 본질로 한다고 보았다. 

 

-. 문화운동

(1) 언론

일제는 조선인의 언론활동을 허용하였고, 동아일보가 왕성활 활동을 시작한다. 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경성방직 주식회사로 이어지는 언론-교육-경제계의 김성수 사단이 형성된다. 이 가운데에는 송진우, 이광수, 유진오가 있었고 이들은 해방 후 한민당(한국민주당) 형성에 기여한다.

* 우익이 동아일보라는 언론사와 긴밀했던 점은 해방 이후 민중에게 우익이 언론 플레이를 잘 할 수 있었던 디딤돌이 된다. 

 

(2) 물산장려운동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고 남한에서는 김성수와 이상재, 북한에서는 조만식이 이를 주도 한다.

 

(3) 민립대학건립운동(1923-25)

민립대학건립운동의 취지는 실력양성운동과 연계해서 볼 수 있다. 또한 그 대상 역시 민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민중을 위한 교육사업이라면 초중고와 같은 교육기관을 먼저 만들어야 했지만,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은 고급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건립운동을 시작했다. 

 

-. 문화운동을 향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 - '누구'를 위한 문화운동인가? 

사회주의자들을 문화운동이 민중을 위해서가 아닌 그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 비난하였고, 결국 자기집단의 재생산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물산장려운동 역시 김성수가 돈을 벌기 위해 애국심 마케팅을 한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자고 시작한 운동이었으나 자본가의 배불리는데 그쳤다는 비판이 있었다. 

 

물산장려운동에서 말하는 '태극성 광목'은 경성방직의 브랜드명이었으며, '광목'은 기계로 제직된 광폭의 조포, 계방직 무명천을 뜻한다. 당시 면직물 시장인 일제가 꽉 잡고 있어 반일정서와 쉽게 연결되었다. 당시 영국이나 일본산 직물은 가격대비 품질이 좋은데 반해 조선은 농가에서 수직기로 짠 무명이 많아 가격대비 품질이 좋지 않았따.

 

사회주의자들은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은 부르주아라고 비판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도 부르주아 & 양반 출신이 많았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적 기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c.f)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전까지는 해외 사회주의자들이 국내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상기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국내 사회주의자들을 뜻한다. *1925년은 한국 사회주의사에서 아주 중요한 연도

 

 

-. 해방 공간에서의 남북한

해방 이후 좌익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기여로 인해 지지율이 높았고, 우익은 문화적 민족주의자, 일제 협력자라는 인식이 있어 지지율이 아주 낮았다. 그러나 이후 한국 사회주의세력은 우익이 내세운 '민족' 논쟁에서 밀려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반탁 운동 등)

 

-. 이후 1960년대 남북한의 민족주의 떠오르면서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의 담론이 재현된다. (정신에 대한 강조, 정신 상태) 

* 박정희의 한국적 민족주의(민족얼, 혼) vs 김일성의 우리식 사회주의(단군, 조선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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