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설공찬전과 중종반정

Varsika 2023. 12. 1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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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공찬전

중종 때 채수가 지은 소설로 1508년과 1510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됨. 조정이 비판을 받고 금서로 정해짐. 드물게 실록에 기록이 존재하는 소설. 

 

○ 내용

설공찬의 혼령이 설공침에게 깃들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설공찬이 들려주는 저승이야기

-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하여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음.

-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수시로 왕래함.

- 설공찬이 저승 소식을 전해줌.

(1) 저승에서는 여성이라도 글을 알면 관직을 맡음.

(2)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라도 잘 지내나 이승에서 존귀한 인물이라도 악을 쌓으면 저승에가서도 불쌍하고 수고롭게 지냄

* 임금이라도 저승에 가면 잘잘못을 따진다(중국 왕도 염라대왕 앞에서는 예의를 지킨다.)는 것과 적선한 사람이 저승에서 잘 산다는 것은 불교적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라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이 현실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 특징

- 당시 기류와는 다소 다르지만 일반 백성들이 아주 흥미롭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 불교적 색채와 더불어 설화적 요소가 많은 것이 인기의 비결로 보인다.

- 사림은 특히 불교적 색채를 비판했는데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는데 반해 이 책에서는 불교의 윤회설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2. 채수(1449~1515)

- 17세에 경산에서 밤에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함. 막내 동생은 이 사건으로 급사함

- 과거에 급제헀고 증광관시, 회시, 전시에서 수석을 차지함(21세)

- 사헌부 감찰과 대사헌을 역임함

- 성종대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조정랑, 대사헌, 공조참판, 성균관대사성, 호조참판을 역임함

- 이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칩거를 시작했고, 덕분에 연산군 4년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를 피함

- 연산군 5년 예조참판으로 등용되나 연산군 10년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유배를 떠남

 

- 중종반정(1506) 이후 관직을 떠나 처가인 경상도 함창에 은거함. 중종반정으로 공신으로 (억지로) 봉해졌다, 반정 당시 참여 거부하자 반정세력이 채수를 술에 취하게 하여 억지로 대궐에 들어오게 하였다. 

 

- 중종 때 설공찬전 때문에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음. (한글판으로 떠돌아 다녀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비판을 받음)

- 교수형에 제수되었으나 직접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 참작되어 교수형은 면함.

영사 김수동이 아뢰기를,

"들으니, 채수의 죄를 교수(絞首)로써 단죄하였다 하는데,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설(邪說)을 막아야 하는 대간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함이 마땅하나, 채수(蔡壽)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선동시켰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가하지만, 다만 기양(技癢)414) 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망녕되이 지었으니, 이는 해서는 안 될 것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벌과 상은 중(中)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어야 된다면, 《태평광기(太平廣記)》·《전등신화(剪燈新話)》 같은 유를 지은 자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공찬전》은, 윤회화복(輪廻禍福)의 설(說)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였으니, 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수함은 과하므로 참작해서 파직한 것이다."

 

* 윤회 화복설 등 불교의식이 비판 받았다. (임금이라도 반역자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문제삼지 않았다.)

* 작품을 모조리 거두어 소각함(소지자 역시 처벌 받음)

 

* 저승, 염라대왕, 여성에 나오는 파트는 의도적으로 채수가 추가한 부분으로 그의 주제의식이 투영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

 

3. 중종반정(1506)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성종의 둘 째 아들)을 왕으로 추대함

 

- 무오사화는 신진 사람과 3사에 대한 연산군의 경고였으며, 갑자사화는 훈구세력을 저격하여 관리들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조치였다. 갑자사화에 반발한 훈구세력이 중종반정을 기획한다.

* 설공찬전은 이러한 기류에 반대 입장을 보인다. 채수는 반정세력으로 포함되기도 하지만 반정의 모습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서도 유교적인 것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적 색채를 강조한 점, 저승에 대한 이야기로 현실(악업)을 비판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언관을 억압하고 유흥에 빠졌다는 것이 반정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의 명분상 연산군 때 죽은 사화의 피해자들을 고평가하게 된다.(조광조 등)

 

- 연산군은 인사를 직접 주도했고 친위 체제를 구축했으며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했다. 사헌부 관원도 감축하였고 인사를 담당하는 서경제를 폐지했음은 물론 경연의 횟수도 줄였다. 전반적으로 언론의 기능을 축소하여 왕권 견제의 기능을 약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 이조판서 성희안,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연산군을 제거하고 중종을 추대하였다. 이들은 연산군을 측근에서 보필하던 인물이었다. 반정 이후 이들은 연산군의 폭정을 강조하였고, 덕분에 역산군 때 쫓겨났던 인물들이 대거 복직할 수 있었다. 

 

* 이문건

설공찬전은 이문건의 일기 <묵재일기> 뒷편에 수록된 것이 기적적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졌다. 이문건은 사화에 연류되어 귀양갔다. 이문건 역시 사림이자 선비였으나 무당, 옥황상제, 점(卜) 등을 모두 공부했다. 조선 전기에는 선비라할지라도 성리학 뿐만 아니라 무속신앙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 많았다. 이문건은 유배가서 고생했지만 사실 위수령 말고는 불편한 점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지만 곧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존재했고 지방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방납에도 관여할 수 있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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