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홍길동전과 서얼들의 삶

Varsika 2023. 12. 14.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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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길동전(소설은 吉童, 실존 인물은 吉同을 씀)

소설 속 홍길동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차별을 받는다.

 

- 홍판서와 몸종 춘섬(천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첩은 당시 천민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 홍길동은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다.

- 산적 무리인 활빈당의 두목이 된다. 

- 이후 탐관오리를 물리치고 민초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 

- 백룡의 딸을 구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 두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차별하지 않는다. 

- 포도대장을 물리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 율도국을 건설하여 이상 정치를 실현한다. (율도국은 현재의 오키나와로 추정된다.)

 

(1)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국문 소설이다.

(2) 실존 인물 홍길동을 모티프로 삼았다. 연산군일기에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중종 실록에도 강도 홍길동이 관원 복장을하고 도적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의금부의 설명에 따르면 홍길동은 대낮부터 관복을 입고 대담하게 관청을 드나들었는데, 어찌 유향소에서는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겠으며 동조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자녀의 신분을 정할 때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을 실시했다. 조선시대에 양반의 축첩으로 첩의 자녀가 많이 늘어났다. 이들을 다 노비로 만들 수 없어 태종 때에 종부법을 잠시 시행하였다. 종부법은 양인의 수를 증가시켜 국가재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노비는 역과 세금의 의무가 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종부법은 폐지되었고 성종 이후부터 첩의 자녀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었다.

 

* 고려시대에는 첩을 잘 두지 않았다. 처가집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던 시대적 상황도 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원 간섭기 이후 첩을 두는 경우가 만하졌는데, 원나라 사람이 고려에서 일부다처를 두는 경우나 미혼 여성이 공녀로 끌려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고려 말 첩은 대부분 자기 노비 중 한명을 삼았고 자연스레 천첩이 많았다. (고려 말엔 혼인에 있어 신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2. 허균(1569 ~ 1618)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서경덕의 문인이었다. (참고로 서경덕은 개경 출신으로 상업에 관심이 많았다.) 허균은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이달은 최경창, 백경훈과 함께 당나라 시에 능해 삼당시인으로 꼽혔다. 

 

성리학을 공부했으나 성리학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았다. 선조대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황해도도사를 지냈으나 기생과 어울리며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고, 1604년에는 수안군수를 지낸다. 계축옥사 이후 이이첨에게 의지하였고, 이이첨은 허균의 문장력을 활용하여 폐모론을 주장했다. 허균이 폐모론에 앞장섰다. 명나라 사행길에도 다녀와 명나라 학자와 교류하였고 천주교에도 관심을 보인다. 

 

광해군 9년인 1617년 정2품인 좌참찬에 이른다. 광해군 10년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이 붙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에 허균의 심복이 연루되어 허균은 능지처참 당한다. 심문도 없이 급살되었는데 허균을 사형시키는데 이이첨이 관여하였고, 결국 허균은 광해와 그 정치세력에 이용(페모론의 선동꾼)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허균이 서얼로써 화를 당하기 쉬운 위치였음에도 숨기보다는 관직을 통해 정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도전처럼 세상을 바꾸려 했을까? 정도전도 방심했다 무방비 상태로 목숨을 잃는데, 실제로 허균 역시 죽기 전날 이이첨을 만나는데, 이이첨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식으로 허균을 안심시키고 그 다음날 바로 죽여버린다. 백성들이 허균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3. 서얼들의 삶

* 양첩의 소생은 서자, 천첩의 소생은 얼자라고 부른다. 

 

(1) 칠서의 난(계축옥사, 광해군 4년, 1612)

고관 서자 7명이 새재(조령)에서 은 상인을 약탈하다가 체포된 사건. 영의전 박순의 서자 박응서, 허균의 처 외삼촌의 서자인 심우영, 서영갑,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허홍인이 연류되었다. 이 사건은 역모사건으로 비화되어 이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의 사주를 받고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적질을 했다는 누명을 쓴다. 이이첨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다. 

* 칠서의 난이 일어난 배경인 조령은 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의 활동 무대가 된다. 

 

결국 김제남과 그의 아들은 사사당하고 영창대군(선조의 적자)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서인과 남인은 정계에서 축출되고 대북파가 정국을 장악한다. 허균도 이때 대북파에 붙게 된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이로 인해 폐모론 주장에 앞장서게 된다. 

 

(2) 조선시대 서얼금고법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한 제도로 양첩과 천첩이 모두 포함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2품 이상의 양첩 소생 서자는 정 3품까지, 천첩 소생은 정5품까지 관직 진출이 가능했다. 이를 한품서용(품계를 제한하여 관리를 서용하는 제도)이라 한다.

 

광해군 시기는 실제로 서얼들의 울분과 차별이 집중된 시기이기도 하다. 내재적 발전론적 견해에 따르자면 임란 이후 양반 사회의 몰락이 가속화 되었고 자본주의 맹아가 시작되고 사회 변화의 폭과 강도가 커졌다. 이는 양반 질서의 동요를 가져왔고 동시에 마이너리티들의 공간적 자유화 사회적 성취의 폭이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적 성장과 자의식 발달)

 

경국대전에서는 허통(서얼금고법을 풀어 관직 진출을 허용하는 것)을 보장했다. 서얼들은 이 제도를 통해서 보충대에 종량할 수 있었다. (면천종량) 사회적 경직성을 완화시키는 장치를 둔 것이다. 그러나 허통이 있어도 문과에서는 서얼을 뽑지 않았고 이는 곧 고위관료가 될 수 없엄을 뜻했다. 서얼은 오직 무과와 잡과에만 응시가 가능했다. 

그리고 호종공(扈從功)이나 전공(戰功)이 있어 통사(通仕)하게 된 자 이외에 혹 군직(軍職)으로 가자(加資)는 되었으나 교지에 허통이라는 것이 기록되지 않고 직명(職名)만 기록된 자에 대해서는 모두 정거(停擧)하도록 하고 수금(囚禁)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며, 혹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더라도 허통이 되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로 가자를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면천(免賤)하고 종량(從良)하는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충대(補充隊)에 편입되었다가 거관(去官)된 다음에야 양역(良役)을 허락하는 것인데, 요즘에는 그들을 곧바로 양역에 소속시키므로 자못 법전의 본 뜻이 없으니, 이것 또한 해조로 하여금 일체 옛법을 따르도록 하소서."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9월 25일 계유 1번째기사
비국이 법률과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다

 

16세기 명종과 연산군의 실정으로 인하여 농민봉기가 잇달았다. 그러나 이건 사회/구조적 모순이지 신분제로 인한 혼란은 아니었기에 서얼들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의병장이 많았던 양반층 주도로 전후 복구사업이 일어났고, 10년만에 조선은 안정을 되찾는다. 이후 양반 중심사회의 경직화가 가속되었다. 양반 지배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인장제도, 호적, 호패, 보충대 입속 규정 등이 강화되었다. 서얼들은 이것에 반발하였다. 양반들은 그들대로 가문의 격을 생각해서 서얼보다는 차라리 양자를 들이는 것을 선호하였다. 

 

서얼에 대한 일련의 중대한 정치/문화적 도전이 17세기 전반에 나타났고, 서얼들이 차별에 반발하는 형태가 지속되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 역시 어머니가 노비로, 일천즉천에 따라 천민 대우를 받았다. 임란 이후에는 허통 아주 제한적으로만 가능했기 때문에 서얼들은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할 수 있었다. 소설 속 홍길동이 육도삼략에 통달하고 천문과 지리에 해박한 것 역시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홍길동은 양반 지배 구조의 경직화가 만들어내는 울분의 아이콘이었다. 홍길동은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홍길동은 충효 사상을 배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탄압받지는 못했다. 진상되는 공물을 약탈하는 내용이 있음에도 이를 개인적 분노를 해소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반면 정감록은 반왕조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강도 높은 탄압을 받았다. 

 

출가한 이후에도 아버지와 화해를 했으며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내용 역시 당시 사회의 근간이었던 충효사상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활빈당의 강령에도 나라에 속한 재물을 탐하거나 백성을 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온다. 즉, 소설 홍길동전은 가정 차원에서의 적서차별 문제에 집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허균은 반왕조 민주사회가 아닌 사회구조의 탄력적 운영이 있었던 조선 초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도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 율도국으로 떠나며 현실세계를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실제로 17세기로 갈수록 양반 지배구조가 경직화되면서 보충대 입소 자격에서 일반 양인을 제외했다. 이는 양반 층의 문무반 정규관직의 독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비양반의 정규관직 진출이 폐쇄되었다. 협소해진 허통의 범위로 인하여 서얼은 양반 사회를 보좌하는 연락로 전락하고 말았다. 양반 소생의 서얼은 계속 보충대로 진출할 수 있었고 적자가 없을 시에는 재산과 제사도 상속받았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양반의 수가 많아지면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서얼 차별이 심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서자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기존의 차별을 강화한 측면이 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광해군 시기 홍길동전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3_0330&ganada=&pageUnit=10

 

교과서 용어해설 | 우리역사넷

[내용] 조선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시행하여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둘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양반들은 본처 외에 많은 수의 첩을 두었는데, 이들 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서얼이

contents.history.go.kr

 

* 종부법 1414(태종14) - 양인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 종모법 1432(세종14)

* 부모 가운데 한 쪽이 노비면 자녀도 노비임을 경국대전에 법제화

* 과거 응시 자격 박탈(1477, 성종 8년 전 후)

* 서얼 차별 반대

- 중종대 조광조 서얼 허통 제안

- 명종대 서얼들의 상소(양첩손에게 문무과 응시를 허용하라)

- 선조대 1600여명 서얼들의 상소

* 임진왜란 시기 서얼 허통 - 납속, 전공

 

* 광해군 시기 - 서얼 차별 강화, 서얼의 지위 추락

- 광해군 시기에는 임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면서 무너진 유교 이념을 살리려는 작업과 왕권 강화책이 강화되었다. 더욱이 칠서의 난 이후로 서얼들에 대한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 진다.

 

- 관상감과 삼의사 관원들의 시위(광해군 원년 1609) → 전원 구속 처벌

여기서 관상감은 지금의 기상청이고 삼의사는 의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여기에는 주로 서얼들이 근무하였다. 

 

*현종대 종모법(현종10, 1669) 이후 번복

- 환천(숙종6, 1679). 일천즉천

- 중량(숙종10, 1684). 종모법

- 환천(숙종15, 1689). 일천즉천

※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노비의 수가 많아졌고 잔반(殘班,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역시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민 남자와 양반 여자가 결혼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종모법에 대한 주장이 많아졌다. 

 

* 영남 지방 서얼 988명 상소(숙종21, 1695) 

숙종대 이후 서서히 서얼에 대한 차별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 서얼 5,000인의 상소(영조 즉위년 1724)

- 종모법 확정(영조7, 1731) * 영조 역시 무수리 소생. 극단적으로 말하면 '얼'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얼을 청요직에도 등용하기로 결정(영조48, 1772) 

* 청요직은 사헌부, 사간원과 같이 언론 기능을 하는 관직을 뜻한다. 

가장령, 가지평 등을 마련했으나 혜택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과거제가 없어질 때까지 서얼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에 대한 거부(veto)가 심하였다. 

- 영조는 호부호형을 막는 자를 처벌하겠다고 공포했다. 

 

 

* 정조1(1771), 서얼의 벼슬길을 넓혔다. 문반이라도 호조, 형조, 공조의 참상(종3품) 이하의 직책을 맡을 수 있었고, 정조대 주요 기관이었던 규장각의 검서관에도 서얼이 등용되기 시작했다. (1779)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 바로 그들이다. 

 

* 순조대에는 서얼의 관직 허용 범위가 더 넓어져 좌윤, 우윤(종2품), 호조, 형조의 참의(정3품)까지 허용되었다. 정조대와 순조대에 차별이 많이 철폐되었으나 한계가 완전히 해제되지는 못했다. 

 

* 헌종대와 철종대에도 서얼들의 집단 상소가 있었고 이후 고종31(1894) 갑오경장(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철폐되며 동시에 사노비 금지,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갑오개혁 이전까지 서얼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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