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인현왕후전과 숙종

Varsika 2023. 12. 16. 13:23
728x90
반응형

1. 인현왕후전

숙종의 계비인 민비(인현왕후)가 궁에 들어와서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겪은 일들을 내용으로 함.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녀가 저술하였으며, (정확한 작자나 저술 연대는 미상이나) 인현왕후의 덕을 기리고 희빈 장씨를 사악하게 묘사.

- 민비가 자식이 없자 궁녀 장씨를 천거

- 장씨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세자로 책봉

- 민비가 폐출되어 서인이됨

- 장희빈이 정비가 됨

- 민비가 다시 복위됨

- 빈으로 격하된 장희빈이 민비를 저주한 사실이 드러나 사약을 받음

 

 

2. 인현왕후(1667~1701)

본관은 여흥으로 아버지 민유중(1630~1687)은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당파적으로는 서인에 속했다. 인연왕후는 15세로 숙종의 계비가 되었고(숙종7년 1681) 8년뒤엔 숙종15년인 689년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가에서 지냈다. 이후 숙동 20년인 1694년에 다시 복위되었으며 숙종27년인 1701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숙종대의 정치(1674~1720)

(1) 숙종의 즉위와 갑인환국(1674)

- 숙종이 14세로 즉위

- 현종의 묘지문을 송시열에게 짓게 함

- 유생 곽세건의 반대 상소

송시열은 갑인예솔 때 효중을 서자로 여겨 자의재비의 복제를 대공복으로 정한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송시열이 유배 당하고 서인들이 축출되었다.

 

(2) 남인의 실각 - 경신환국(1680)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이 유악을 무단 사용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거기에 허적의 서자 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 군 등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이른바 삼복의 변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인사조치가 단행되된다.  숙종은 도체찰사부 군사를 동원하여 허건과 삼복, 허적, 윤휴 등 남인계를 축출한다.

 

(3) 장희빈과 기사(1689), 갑술환국(1694)

- 소의 장씨가 1689년 아들을 낳고, 이듬해 그 아들이 원자가 되었음.

서인은 이에 반대했으나 오히려 송시열의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 끝에 사사됨. 영의정 김수흥(감상헌의 손자이자 김수항의 형)도 파직된다. 김수흥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690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 1689년 희반 장씨가 중전으로 책봉되었다. 

- 서인 김춘택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였고, 남인들이 이를 문제 삼자 이번엔 남인들을 축출하였다. 서인 가운데서는 소론을 중용하였다. (1694)

-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었다.

- 인현왕후가 죽은 후 장희빈의 저주가 드러나 장희빈은 1701년 사사되었고 장희재는 처형 당한다.

* 소론은 세자를 지지했고, 장희재에게도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 장희빈

궁녀에서 후궁, 숙원(내명부 소속, 종4품), 소의(정2품), 희빈(정1품)에 올랐으며 아들은 낳은 후 왕비가 되었다. 인현왕후의 복위와 동시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희빈으로 죽어 장희빈이라 불린다. 

 

(4) 노론과 소론의 갈등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소론이 세자에 대한 지지를 보였다는 점이다. 갑술환국 직후 소론의 의견을 반영하여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에게도 관대한 처분이 있었다. 이후 장희빈을 사사에 이르게 한 것은 노론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재 윤증은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함께 서인에 속해 있었으나 후에 갈라서게 된다. 송시열을 노론의 영수, 윤증을 소론의 영수로 여긴다. 이 둘은 기유의서(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송시열에게 쓴 편지) 사건 이후 본격적인 갈등을 빚게 된다. 초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윤증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았으나(1714), 이후에는 윤증의 송시열에 대한 비판이 비난 받기 시작했다. (1716). 결론적으로 송시열계인 노론이 조정에 득세하게 된다.

 

(5) 숙종대의 시대(조선 후기 정치, 경제, 인현왕후, 장희빈, 환국)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으며 이로인하여 상인과 중인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장희빈 역시 중인 가문 출신이다. 장희빈의 아버지가 역관이었다.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은 역관이었는데 1669년 사망하여 이후 장희빈은 당숙과 살았다. 당숙인 장현 역시 역관이었으며 남인 계열의 사람이었다. 장현의 딸도 궁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각했다. 

 

○ 숙종대의 정치와 환국

 

1674년 - 12세의 나이로 즉위

1675년 - 남인 우위의 정국

 

1680년 - 경신환국. 허적과 윤휴를 몰아내고 서인 우위의 정국 조성

* 경신환국 때는 서인 계열인 대비(명성왕후, 명성대비)가 남인 축출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음.

* 명성왕후의 부친이 서인 세력인 김우명이다. 

 

1681년 - 인현왕후 즉위(~1689년)

 

1684년 - (양력 기준)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당시의 대왕대비(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는 남인 계열이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대비에 의해 축출되자 기회를 엿보던 대왕대비는 1684년(양력 기준) 대비(현종의 비, 명성왕후, 명성대비, 현렬왕대비 등으로도 불린다)가 사망하지 다시 남인세력을 등용시킨다.

 

1687년 - 장옥정 숙원으로 책봉

* 숙종은 계비 인현왕후가 있었음에도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총애한다. 결국 후궁에서 숙원으로 책봉되는데 이때는 장희빈이 임신도 하지 않았던터라 고속 승진이라고 볼 수 있다. (1687년 1월) 결국 장희빈은 남인 세력학장의 디딤돌로 활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688년 - 장옥정 소의에 책봉

 

1689년 - 기사환국,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중용

* 장옥정 희빈에 책봉, 1689년 왕자 탄생

* 서인의 송시열은 훗날 원자의 세자 책봉에 반대했다. 후궁의 태생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축출 되었고 남인의 주도하에 송시열은 사사당한다.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1689년의 일이었다. 남인이 다시 조정을 장악한다.

* 남인들은  서인계열인 인현왕후가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폐위를 주장하였고, 결국 인현왕후는 폐위된다. 

 

1690년 - 장희빈 왕비로 즉위(~1694)

* 대대로 왕비는 양반가에서만 나왔으나 장희빈이 최초로, 중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690년 왕비로 책봉된다. 당대의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694년 - 갑술환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으로 정권을 교체함

* 인현왕후 복위(1694년 ~ 1701년)

 

1701년 - 신사의 옥, 남인 잔존 세력 말살, 소론의 영향력 약화, 노론 득세 

* 장희빈 자살 명령 - 인현왕후의 사망 이후, 그간 병문안을 가지 않았던 것과 저주에 관련된 내용이 적발됨

* 장희빈은 희빈 강등 이후 8년 가까이 인현왕후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 장희빈의 희빈 강등 이후 후궁은 왕비가 되지 못한다는 법까지 제정되었다. 

 

1720년 - 숙종 사망

*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인 훗날의 경종이 즉위 이후 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노론과 힘을 합쳐 폐세자 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한다. 

* 서인 계열 무수리 최씨의 등장(영조의 모친) 이후 왕자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낳았다. 숙종 사후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였고, 노론은 연잉군(훗날 영조)를 지지하였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