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박씨전과 인조대 호란

Varsika 2023. 12. 1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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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씨전 

박씨가 결혼한지 3년 만에 추녀의 탈을 벗고 미인이 되고 이후 병자호란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청나라 장수를 막아내며 활약한다는 내용이다. 

 

세종 때 한양에 살던 이득춘은 늦게 아들 이시백을 얻었다. 이득춘은 오래 전 금강산에 살고 있는 박처사를 만나 서로의 자녀를 혼인시키고자 약조한 바가 있었다. 이에 이시백과 박처사의 딸 박씨가 혼인하였으나 박씨는 박색하여 혼인한 직후부터 홀대를 당하였다. 박씨는 피화당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 홀로 거처했는데 능력이 뛰어나 조복을 짓고(시아버지의 관복을 하루만에 만든다) 재산을 늘려나갔으며(말을 사서 되팔아 수깅르 남김) 남편을 장원급제 시키기에 이른다. 남편의 장원그벶 역시 부인의 염력이 기여한 바가 있다. 

 

3년이 지나 박씨의 외모가 절세미녀로 탈바꿈 되었다. 남편 이시백은 그간의 잘못을 사과하고 박씨는 시댁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시백은 장수 임경업과 함께 중국 가달의 난을 평정하여 각각 우승상과 부원수가 된다. 이후 호왕(후금)이 조선을 평정할 목적으로 기룡대를 조선에 잠입시키나 박씨가 이것을 알아차리고 방비하도록 하였다.

 

훗날 호병이 조선을 침공하자 박씨는 부녀자들의 자신의 피화당에 피신케한다. 그리고 적장 용골대와 그의 동생 용홀대가 피화당을 공격하자 물리친다. 퇴각하는 용골대 형제는 임경업 장군에게 대패하고 돌아간다. 이러한 공으로 말미암아 임금은 박씨를 충렬 부인에 봉한다. 

 

- 작자와 저술 연대 미상

- 전반부는 세종대, 후반부는 선조대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세종대와 선조대는 일부 나오는 수준이고 후반부는 모두 인조 및 병자호란 시기의 일이다. 

- 박씨부인이 남편 이시백보다 능력이 우월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는 조선 전기보다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더 낮아지는 것이 특징인데 박씨전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다.

- 오랑캐 청나라에 당한 민중의 분노를 해소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창작됨(민족의 자존심 회복)

- 이시백, 임경업은 실존 인물인데, 실존과 허구의 인물을 배합하여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시백의 아버지 역시 기록에 남아있으나 이름은 이득춘이 아니라 이귀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초년에 고생을 굉장히 많이 했다가 훗날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것으러 전해진다. 이시백이 병조판서까지 한 것으로 볼 때 집안이 문보다는 무의 기질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씨의 남편으로 이시백을 설정한 것에 대한 추측이 많은데, 아비인 이득춘이 일반 백성들과 잘 소통할 수 있었던 부분들(초년에 고생을 하며 자랐기에 백성들과 크게 유리되지 않았다고 느껴짐)을 가졌고, 그리고 인물의 성격이 우직하고 뚝심있는 것으로 전해져 이러한 부분이 백성들에게 좀 더 잘 다가갈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득춘은 본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몰락한 상대 가문과 결혼을 한 것인데 이는 그가 박씨의 능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반면 남편인 이시백은 첫날 부인의 얼굴만 보고 바로 실망을 한다. 이득춘의 이러한 진중한 태도와 선구안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충분히 백성을 도울 수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 필사 중 이시백 - 이득춘에 대한 내용에 혼선이 있일 수 있음)

 

이시백은 부인의 신묘한 능력을 알게 된 후 조정에 보고하고자 하나 김자점이 막아서 알려지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 김자점은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훗날 병자호란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나 정계에 복귀한다. 효종 때 역모에 연류되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한다. 소설 속에서도 김자점은 악역으로 나오는데 이는 김자점이 역모에 몰려서 죽었기 때문에 나쁘게 묘사해도 후환이 두렸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김자점이 실정한 부분이 있디만 호란의 모든 책임을 김자점에게 묻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도 있다. 인조반정 세력은 친명배금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기 대문이다.) 

* 실존 인물 이시백의 장인 윤진도 임진왜란 때 성을 지키다가 전사한다. 이시백의 부인이었던 윤씨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2. 인조대의 호란

- 인조 반정 후 서인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했는데 이는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 조선 조정은 후금 측에서 요구한 망명자들을 송환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조치는 명나라 공격에 앞서 조선을 견제해야 한다는 후금 강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후금은 인조 5년인 1627년,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공한다. 

-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나 결국 정묘약조를 체결하고 조선과 후금을 형제의 관계로 규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한다. 

 

- 이후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였다. 태종은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는데 여기에 조선 조정이 반발하였고 결국 청 태종이 12만 군대를 이끌고 인조 14년인 1636년 조선을 침공하니 병자호란이라 한다.

 - 인조는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자신고 강화도로 가려하였으나 청나라 선봉대에 의해 길목이 차단당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일반 관리였던 김상현은 싸움을 주장하고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한다. 

-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당시 피신했던 양가의 부인들은 잇따라 자살하고, 조선의 왕자는 포로로 잡힌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송파)에 나가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절을 갖춘다. 인조 15년 1637년의 일이다. 

 

-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간다. 주전파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도 잡혀가는데 이들은 죽임을 당한다. 김상현 역시 투옥된다. 

- 병자호란은 물질적 피해보다 정신적 피해가 컸다. (백성들의 피해의식. 실질적 피해는 임진왜란이 훨씬 큼)

(c.f)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성 - 환향녀/화냥년

 

- 소현세자는 볼모시절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인조는 이를 경계하였고 결국 소현세자 귀국후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관계를 돈톡히하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을 견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할 때의 명분도 광해군에 대한 복수였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라는 도구를 바탕으로 조선 정치에 청나라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함) 신하들 역시 소현세자를 경계했는데 소현세자가 친청파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결국 대신들은 대대적인 물갈이가 불가피했다. 즉, 소현세자가 왕이 되는 것은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죽음 역시 석연치 않았다. 귀국 후 불과 두 달만에 사망하는데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다. 인조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할지라도 인조의 묵인하에 진행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소현세자 사후 세자의 자리가 소현세자의 아들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형제인 봉림대군에게 돌아간 것 역시 석연치 않다. 소현세자의 남은 가족들에게 한 인조의 조치 역시 독살과 연계된 것이 아니라고 보기에는 너무 잔혹하다. 

 

소현세자는 당시 아들이 셋, 딸 넷이 있었다. 소현세자 사후 민회빈 강씨가 인조에게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에 대한 인조의 조치에 항변했는데(강씨는 맏며느리임에도 인조에게 아침문안을 하지 않았다.) 결국 궁에 유폐되었다. 훗날 인조는 세자빈이 자신의 전복에 독을 탄 사람이라고 몰아 사약을 내려 죽인다. 소현 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경선군, 경완군)은 제주도 유배 중 사망한다. 경안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풀려났으나 오래지 못해 요절한다. 다만 자손을 남겨 지금도 소현세자의 직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 후손이다. 소현세자가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말 한마디를 했다는 이유로 일가가 풍비박산 나 버린 것이다.

 

- 봉림대군이 결국 즉위하니 훗날의 효종이다. 인조의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을 주장한다. 다만 이것은 현실적인 군사정책이라기보다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봉림대군의 정치적인 레토릭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효종 즉위 이후에도 청은 조선에 대한 경계를 유지했고 실제로 조선은 별다른 군사훈련을 진행하지 못했다. 

 

- 효종이 사망하면서 예송논쟁이 발생한다. 효종은 10년 동안 재위했지만 조정에선 사망 이후 조치를 잘 준비하지 못했다. 

 


윤휴·허목·윤선도·원두표 등의 남인세력은 『의례주소』 참최장을 근거로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장자로 보아야 하며 이에 3년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윤휴는 3년복은 말할 것도 없이 왕에게는 어머니도 신하가 된다는 입장에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삼년복을 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송시열 등 서인세력은 『의례주소』 중 장자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사종지설에 따라 효종이 둘째아들로 통을 이은 경우, 곧 ‘체이부정’에 해당하며 서자(庶子)일 뿐이니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정태화가 서인의 예설을 위험시하였던 것은 인조의 적자인 소현세자는 죽고 없지만 그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은 1656년(효종 7) 귀양에서 풀려나 1659년(효종 10)에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에 책봉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송시열의 예설에 따르면 효종이 변칙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원칙대로라면 경안군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현종초 기해예송으로 인해 왕실의 위험인물로 떠올랐던 경안군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1665년(현종 6)에 사망하게 된다.

이처럼 서인의 예설은 현종대 왕실에게 매우 위험하게 비쳐질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었고 이에 정태화를 위시한 여러 대신들은 무난하게 국제인 『경국대전』 중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기년복으로 서둘러 복제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대신들은 국제를 내세워 기년복을 결정하였지만 사람들은 송시열의 예설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된 것, 곧 서인측의 예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3. 기타

중세 이후 중국은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 한족의 명나라, 여진의 후금과 청으로 역사가 이어진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숭상했던 것은 한족이 세웠던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였다. 이러한 사대주의는 분명 조선의 과학발전에 많은 걸림돌이 된 것이 사실이다. (참고. 북학파)

 

청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의 기본 마인드였다. (훗날 정조대에 이르러야 그나마 청의 문물을 일부 수용한다.)

 

호란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인조반정 공신들은 대부분 주화파였다. 공신이 아닌 인조 지지세력은 주전파라서 전쟁 이후 청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당한다. 결국 책임 질 세력들은 그대로 남고, 엉뚱한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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