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한중록과 사도세자

Varsika 2023. 12. 1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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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중록

  *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자서전적 회고록

정조 ~ 순조대 이야기를 4편에 걸쳐 나누어 썼으며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 담겨있음

 

  * 4편으로 이루어졌음

     • 1 세자빈이 된 이야기 등 50여 년의 궁중생활(정조19;1795)

     • 2- 사도세자 사건 이후 정조 초년까지의 이야기(순조1;1801)

     • 3 어린 순조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고 호소(순조2;1802)

     • 4 사도세자의 사건 내막을 밝힘(순조5;1805)

   * 순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으로 비난 받는 아버지 홍봉한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 쓴 글로 당시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선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음.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고자 뒤주를 가져오라 했을 때 홍봉한이 이 뒤주를 가져왔다는 설이 있었다. 실제로는 궁의 내시가 뒤주를 가져온 것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이러한 소문이 바로 경주김씨 가문에서 홍봉한 축출을 위해 모함을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것을 바로 잡고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내는 집변을 보였다. 

 

홍봉한의 집안은 가난했으나 영의정을 배출하기도 한 명문가로 4대조 할머니는 선조의 왕녀인 정명공주다.

 

 

2.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1737~1815) 

  * 본관 풍산,

  *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둘째 딸

  * 집안은 가난함

     - 9살 세자빈으로 간택에 입고 갈 옷장만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세자빈 책봉에는 총 3번의 간택이 필요한데, 처음부터 영조가 혜경궁 홍씨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번의 간택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측이 많다. 

 

  * 가문은 훌륭함 - 4대조 홍주원 : 선조 임금의 부마, 고조 홍만용, 조부 홍현보 예조 판서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이라 집안이 좋은 세자빈을 선호했다. 

 

* 세자빈 간택은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정쟁의 표적인 외척이 된다는 부담감도 함께 존재했다. 따라서 명문가라고 하여 모두가 세자빈 간택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자빈 간택에 참여하는 자는 처녀단자라고 불리는 후보자, 가문에 대한 정보를 적은 문서를 제출해야 한다. 처녀단자를 제출하는 수도 대개 20여명에서 30여명에 그쳤고,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어, 뽑히지 않기 위해 간택 과정에서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3. 사도세자와 영조

  * 영조 42세에 사도세자를 얻음

     - 어릴 때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세자에 대한 기대가 큼

  * 사도세자의 성격

     영조와는 다르게 행동이 날래지 못함. 공부에 관심이 없음. 놀이에만 열중. 어릴 때는 명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성장하면서 칼놀이나 말타기와 같은 놀이에 열중함. 

 

     - 어릴 때 저승궁 나인의 손에 성장한다. 이 때 나인들은 영조나 사도세자의 생모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나인들로부터 영조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된다. 경종은 31세때 아들을 낳았는데 경종 스스로 몸이 약했던터라 왕위에 오르자마자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세제로 책봉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경종을 지지하고 연잉군 세제 책봉을 반대했던 이들이 소론, 연잉군 편에서 세제 책봉을 주장한 사람들이 노론인데, 경종 2년에 결국 소론이 승리하고 노론 세력은 귀양을 간다. 이후 노론 세력이 경종을 독살하려 한다는 고발이 들어왔고, 이로 인해 다시 한번 노론이 탄압받는 신임사화가 일어난다. 사도세자는 나인들로부터 이때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략 10살 전후의 나이였을테니 나인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비판적 사고없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는 이런 모습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세자가 15(1749)에 대리청정, 영조의 기대에 못 미침. 그러나 사도세자의 실력과 별개로 영조의 지나친 간섭도 많았다. 앞에서는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하나하나 다 간섭했고, 영조가 기존에 결정한 사항을 사도세자가 변경하거나 뒤엎으면 반발했다. 때로는 기후조차 세자의 탓으로 돌렸다. 결국 사도세자는 때때로 잘못을 빌었으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우물에 뛰어들고 자살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15세의 사춘기에 수렴첨정을 시작하였으나 순탄치 않았고 결국 20살이 넘어가면서 조울증 증세가 대대적으로 나타난다.

 

  * 사조세자의 반발

     금주령 시기에 음주, 화가 나면 사람, 짐승을 죽임,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증세를 보인다. 화가나면 참지 못하고 나인들을 죽였으며 옷을 여러 벌 갖다 놓고 결정하지 못했다.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영조는 이러한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면서 더 격노했다. 영조는 본래 간장에 빠진 파리를 건져 살려주고, 한낱 곤충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고 기록에 나오나 사도세자에게는 매정했다. 

 

  * 나경언의 고변(영조38;1762)

     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음. 세자가 비밀리에 평양에 다녀옴

     세자의 비행 10여 조목을 나열, 나경언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

 

나경언의 고변은 무고일 가능성이 높다. 역모를 준비하는 사람이 오히려 눈에 띄게 평양을 다녀온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이지 못하다. 이떄 나경언이 역적으로 몰려 죽고 사도세자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다.

 

* 사도세자의 죽음(영조38;1762)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을 명함.옷을 찢어 목을 매었으나 신하가 말림. 뒤주를 들여 뒤주에 가둠-9일 뒤 사망

 

아무리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다고 한들 이 때문에 아들을 죽였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정치적인 요인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당시 정계는 외척인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경주 김씨 김한구, 김귀주 세력이 사도세자를 공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사도세자는 나경언 죽음이 있고 약 20여일 후, 혜경궁 홍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들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영조의 행차소리)는 "내가 죽으려나 보다"라는 말을 하고는 혜경궁 홍씨에게 더 이상 못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다. 영조에게 불려간 사도세자는 자결을 명 받는다. 사도세자는 옷을 찢어 목에 감는데 신하들이 달려와 말리기를 몇번 반복하고 세손(훗날의 정조) 역시 11세의 나이로 달려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 말한다.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강등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혜경궁 홍씨는 그 9일 동안 자신도 자결하려고 했다가 세손을 보고는 삶을 이어가기로 결정한다. 사도세자가 벌을 받았기 때문에 세손 역시 바로 왕위에 오를 순 없었기에 훗날 호적상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조치를 취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와우이에 오르자마자 공식적으로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 사도세자는 이미 10대 후반부터 20살 어간에 정신병이 있지 않았나 추측해볼 수 있다. (한중록에 나온 기록을 볼 때) 사도세자의 생모였던 영빈 역시 정신병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기미가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노론 벽파 : 김귀주, 정순왕후 등 경주김씨 집안 - 사도세자가 죽을 짓을 했다.

* 시파 : 비행을 했다고하여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홍봉한, 혜경궁 홍씨)

 

  * 외척 풍산 홍씨가 사도세자를 지키지 못했던 이유  세손이었던 정조를 지키기 위함

4. 홍씨 집안 사람들의 신원(伸寃)

   * 홍낙임 관작 복구(순조7;1807), 천주교를 믿어서 사형당한다. 

   * 홍봉한에게 죄가 없음(순조8;1808)  

   * 홍인한 철종대

   * 사도세자의 시호 장조(莊祖) 고종대

 

 

5. 정조 즉위 이후의 시대

정조는 앙위에 오르자마자 노론이 쥐고 있던 군권을 되찾고 왕권을 강화한다. (숙종대에도 환국이 반복되면 집권세력은 반드시 군권을 먼저 손에 쥐려고 했다.)

 

정조는 즉위 25년 만에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그래서 독살설도 많다. 11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매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어릴 때부터 밤에 마음을 푹 놓고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이러한 점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이유가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물론 노론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순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결국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한다. 정순왕후는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조대부터 그랬다. (사도세자를 죽일 떄 교사한 듯한 혐의를 받은 사람이었으니)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에 경주김씨가 복권된다. 장용영을 없애고 정조가 했던 개혁정치가 모두 사라진다. 홍낙임도 이때 사사당한다. 정조때는 영의정 채제공 시스템 하에서 천주교도들을 처벌하지 않고 묵인해주었는데 순조시기부터는 처벌이 강화된다. (채제공이 천주교에 특별히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편 혜경궁 홍씨는 정조대 혹은 그 이후 사도세자가 복권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복권을 위해 노력했다. 정조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울었던 탓에 신하들 중에서도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나오지 못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을 뿐이지만, 정조는 '장헌'이라는 전호를 올려 '장현사도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나 종으로 추존하지는 못했다. 장조로 추존된 것은 고종 때의 일이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며 풍산 홍씨에 대한 관직을 복권한다. 순조 8년,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나름 신원을 복구 시켜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홍봉한의 이복 동생이자 홍봉한과 정치적 거리를 두면서 세력을 구축했던 홍인한은 영조 말기 세손이었던 정조의 대리통치를 극구 반대했다. 정조가 즉위한 뒤 고금도에 위리안치 되고 오래지 않아 사사된다.  철종 때 신원이 복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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