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의산문답과 새로운 사상

Varsika 2023. 12. 1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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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산문답(醫山問答) / 의무려산은 바로 중원과 요동에 경계에 있는 산이다. 

   허자가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은둔하고 있는 실옹을 만나 서로 토론한 이야기. 소설이라기엔 가상 인물끼리의 문답식 형식이다. 

   허자는 전통적인 성리학자

     실옹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 실학자(전통적 성리학자는 아님)

   성리학의 거짓 예의와 학문적 한계를 말

- 그 사람을 겉모습만을 보고 군자라고 여긴다든지, 면전에서는 몸을 낮추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존경하기보다는 겉으로만 하는 꾸밈에 가깝고, 학문에 대한 자긍심을 이야기하지만 그마저도 관직 등 자기 이익을 위한 것에 가깝다. 즉 백성들을 위한 성리학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생각한 성리학.

 

  * 내용

    거짓된 예의와 학문

    인간과 만물에 대한 의견

     - (낙론) 사람과 만물(초목, 짐승)은 같다  →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 신분철폐

     - (호론) 사람이 지키는 예의는 다른 것들에 비해 훨씬 고차원적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심

     - 천문 지리, 천체의 운행

        땅은 둥글고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한다 / 자전설 : 동양 최초로 제기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제일 소중하지만 만물의 측면에서보면 제각각 제일 소중하다. 

 

   세상의 중심은 각자 사는 곳

     - 중화사상의 부당성 지적

   풍수지리와 재이설은 미신

     - 음양은 햇볕의 강약에 따라 나타남

     - 이미 죽어서 썩어버린 부모가 그 자손들에게 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은 미신이다. 묘를 지나치게 호화롭게 할 필요가 없다. 

   

   ⇒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사상이 잘못된 점을 지적, 새로운 문물을 사상적 충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 마련. 의산문답은 18세기 조선을 뒤 흔들었다. 

 

2. 홍대용(洪大容:1731~1783)

   본관은 남양(南陽)

   노론 가문의 맏아들(기득권 세력 출신이나 청나라를 다녀오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주에서 나경적을 만나 혼천의 서양식

     자명종에 관심(29)

   서장관인 숙부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청나라에 따라가 북경에 체류(35)

     - 선교사들의 자연과학 지식에 관심. 북경에서 세 명의 선비를 만나 토론

     - 지구는 둥그니까 모두가 제각각 중심이다. 중화사상의 타파

     -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파이프 오르간도 보고, 천주당에서 세계지도도 보는 등 신문물에 관심을 보임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에게 영향을 미쳐 북학파 형성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1774)

    사헌부감찰(정조1;1777). 높은 직책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했고 음직으로 역임했을 뿐이다. 

    • 낙론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 

    •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던 시기, 폐쇄적이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않던 사회에 변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 바로 홍대용

 

3. 새로운 사상

  * 부익부 빈익빈 현상

     충청도와 경상도에 기근 -40만 명이 굶주림(영조9;1733)

     호남 지방에 기근- 50만 명이 굶주림(영조39;1763)   현실 개혁의 필요성

 

부익빈 빈익빈 현상이 있었더라도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면 다행이었을 테지만(박정희 시절처럼) 기근을 겪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바라기 쉽지 않았다. 조선 후기 의창과 같은 시스템이 있었지만 환곡에 대한 병폐도 생각나도 실질적으로 백성들을 구휼하는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양반은 늘어났으나 양반은 원칙적으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홍대용은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양반이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가난한 것은 양반이 일을 하지 않아서다)

 

성리학이 예의를 중시하고 서로 상생하자는 이념인데 이것만 갖고는 부족하다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는 것이 우선순위였기에 중농학파, 중상학파 등이 나왔고 특히 중상학파는 서양 문물을 도입으로 상업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상의 변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요구     → 실학

    서양 과학을 적극 수용

    문화에 대한 다양성과 독자성 인정. 문화라는 것은 다양성이 있는 것이니 단순히 우열을 나눌 수 없다. 중국에서는 차를 많이 마시는데 이것 역시 단순히 그들의 문화일 따름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며 ㄴ된다. 

     - 청의 문물 수용 제시

 

  * 현실 개혁 방안

     토지제도 개혁 - 토지를 농민에게

     상업의 발달  상인에 대한 천시 변화 필요

     양반 중심의 신분제 변화 필요 - 양반이라고 꼭 관직에 나갈 필요는 없다. 

       -  문벌 폐지

           능력에 따라 관리 임용 - 일반 백성이든 양반이든 관직에 나갈만한 성품과 능력이 있다면 등용하면 된다. 

           학교 제도 개선 - 교육이 중요하고 교육을 위해서는 학교제대고 개선되어야 한다. 

       - 신분에 따라 직업이 정해지는 것이 없어져야 한다. 성리학에 고착화된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뀌어야 한다. 

 

 

비록 이 시대에는 크게 바뀐 것이 없었지만 홍대용의 영향을 박규수가 이어받았고 구한말 김옥균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변화의 기회가 왔을 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물꼬가 중요하다. 당대의 변화는 크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 흐름을 바꾸는데는 큰 공헌을 하였다. 

 

 

정조 역시 이런 북학파의 사상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사상이 밑바탕 되어야만 현실적인 정책개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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