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온달설화와 고구려 귀족사회

Varsika 2023. 12. 1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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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달 설화

- 삼국사기 열전에 전함

- 바보 온달이 평강 공주와 결혼하고 대형(大兄) 관등을 받음

- 평강왕(평원왕 559~590) 시기 온달이 무인으로 출세하고 활약함. 온달과 왕의 만남(수렵대회, 북주와의 전쟁)

* 바보 온달과 공주의 결혼 가능성(실제 평민과 공주의 결혼이 가능했을까?)

 

- 가난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첫 설화

- 경제적으로 몰락했지만 신분적으로는 예속된 상태가 아니다.

- 황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재산을 축적한 부유한 계측일 수 있다. (황금이라는 물질은 전통적인 부를 향유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임)

 

2. 온달의 신분

 

(1) 평민- 부민(경제성장과 사회분화를 통한 부민의 성장)

-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감.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음.

* 농/상/수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읍락사회가 해체되고 개별 가호(個別 家戶)의 경제적 자립성이 높아졌다. 

※ 읍락(邑落)사회: 삼국시대 이전부터 부족국가시대부터 존재했던 지역공동체

* 소와 말을 구매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온달 개인의 소유권이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 경제적 부를 축적(황금) - 부민

-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국가의 정치 지배체제의 하부로 편입(무예능력)

 

(2) 하급 귀족 - 무사

- 공주와 통혼권을 벗어난 낮은 신분('바보'라는 이유)

- 용감하고 뛰어난 무사

- 전쟁에서 군공을 세움

 

(3) 귀족

-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귀족

-초임 관등으로 대형을 받음 -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의 하나

 

3. 6세기 고구려 귀족 사회

 

(1) 6세기의 경제 변동

- 생산력의 발전: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의 보급, 우경의 권장과 확대, 수리시설 확충 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부농의 탄생

* 신라의 경우 우역 설치, 도로 정비(487), 왕경에 시장 개설(490), 지증왕 때 東市 개설, 관청 시전(市典) 설치(509) 등 경제적 발전이 기록에 남아있다. 고구려는 당시 신라보다 더 큰 경제력을 가진 것으로 미루어볼 때 충분히 부농의 탄생이 가능했을 것이다. 

- 소와 철제농기구 소유: 상당한 토지와 부 소유(부호농민), 황금획득, 정치적 진출

 

- <구당서> 고구려전

"고구려의 풍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며 미천한 집안까지도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르고, 자제들이 결혼을 할 때까지 그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 생계가 해결된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알 수 있음

*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도 결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 & 낮은 평민의 신분 때문이지 무예는 출중했다.

 

따라서, 기본 소양과 경제력을 가진 온달이 수렵행사와 대외전쟁이라는 환경을 만났을 때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민도 무예실력을 통해 하급무사로 진출할 수 있었던 고구려 사회의 모습)

 

(2) 6세기 전투

- 북주와의 전투

평강왕이 지휘하는 전투에 참여했으며, 온달의 분전으로 고구려가 승리했다. 온달은 국왕을 전사 위기에서 구해냈고 평강왕은 크게 감동하여 온달을 사위로 삼을 것을 약속한다.

- 고구려 동천왕대 위나라와의 전투에서 실제로 동천왕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고, 당시 밀우와 뉴유라고 불리는 인물들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3) 6세기 정치적 혼란

공주와 통혼권이 아니면서 결혼. → 사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온달 역시 통혼권을 가진 계층이 아니었기에 '바보'라고 불렸다. 엄청난 군공이 아니었으면 공주와의 결혼은 힘들었을 것이다. 김춘추의 조부가 왕이었음에도 그 역시 쉬이 결혼하지 못했다. 통혼권 없이 결혼한 사례들은 크게 다음과 같다. 

- 고구려 안장왕

- 신라의 소지왕

- 신라의 장보고

- 신라의 김서현(김유신의 부친)

 

그러나 온달이 대형(7위의 관등, 대귀족이 거쳐가는 자리)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본래 귀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대형은 일정 규모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자리이다. 따라서 온달 귀족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온달은 본래 귀적이었으나, 정치적 부침을 겪고 중앙 정계에서 축출된 자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무왕의 경우와 유사)

 

- 정치적 혼란

안장왕의 죽음(531), 정치세력의 정쟁(545) - 추군과 세군의 대립(외척 귀족세력간의 왕의계승 갈등), 국내계와 평양게의 대립

* 평강공주와의 결혼에서 온달과 경쟁적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상부 고씨도 고려해야 한다. 상부 고씨는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만 기록이 남아있다. (상부(上部) 고씨(高氏): 고구려 5부 가운데 상부에 속하는 고씨를 의미한다. 상부는 동부(東部) 또는 순노부(順奴部)라고도 한다.)

 

(c.f) 왕건이 돈 많은 호족 출신이었고 호족과 혼인하여 안정책을 폈쳤다. 온달 역시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c.f 2) 지방의 향리들이 중앙 정계에 제도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 정치적 타협

안장왕(521), 평원왕(560)

- 졸본의 시조묘 참배 → 민심 수습과 타협

* 국내계 회유. 대내외적인 위기극복, 국내계의 귀족연립정권 참여(귀족연립정권은 연개소문대에 사라진다), 온달과공주의 혼인

 

당시 고구려는 돌궐이 치고내려오고, 신라는 북상하고 있었다. 거기다 대내적으로는 환도산성의 반란마저 있었다. 내부를 수습하고 외세를 막으려면 국내성계를 반드시 회유시켜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온달은 국내성계 무장파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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