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찬기파랑가와 경덕왕대 사회변화

Varsika 2023. 12. 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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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

 

(구름을) 열어 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떠나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 달은 임금을 상징, 흰구름은 기파랑을 상징함. 

* 달과 조약돌을 만나도록 해주는 매개체는 바로 흰구름(기파랑)

 

이로부터 시냇가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 가를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랑의 우두머리시여

(<삼국유사> 권2, 기이 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 시냇가 조약돌은 백성을 뜻하고, 서리 모를 화랑의 우두 머리는 고깔을 말하며 고깔은 화랑 정신의 표상이다. 

 

- 기파랑 찬양을 통한 시대구원 기원

- 기파랑은 백성과 왕 모두의 지지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 기파랑이라는 인물형상을 통한 사회통합 추구

→ 화랑정신의 복고를 통해 신라중대의 모순해소와 국가통합을 기원

 

- 충담사가 지은 10구체 향가로 화랑 기파랑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충담사는 이 작품을 통해 전제왕권의 직접지배에 따른 사회통합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인천강의 형상을 차용했다.)

- 경덕왕(재위 742 ~ 765) 시기의 향가다.

* 경덕왕 시기에는 전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했다. 삼한일통의 완성과 유지를 위한 통치이념이었는데 통일이 완수된 이후 귀족들이 반발하는 씨앗이 되었다. 

* 654년부터 780년 혜공왕까지를 신라 중기로 본다. 혜공왕 이후에는 전제왕권이 몰락한다. 진골귀족의 사회경제적 성장이 이를 촉진했다. 

- 기파랑을 달과 잣나무에 비유

 

2. 경덕왕대의 사회변화

- 경덕왕은 전제적 정치체제를 추구했다. 화백회의체를 견제했고 관료제도 발전을 위해 국학을 진흥했다.

* 신라 중대에는 골품제 사회의 모순을 중앙집권을 통해 일정 정도 해소한다. 화랑 제도 역시 마찬가지. (화랑제도의 핵심이 골품제 모순의 해소를 통한 사회통합/국가통합) 

- 귀족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상대등 김사인이 경덕왕 15년 상소를 올려 개혁정치를 반대하기도 했다.

김사인은 결국 이듬해 상대등에서 물러나게 된다. 

* 재이災異 현상 : 국왕의 실덕失德, 기후 재난을 국왕의 실덕에 의한 것이라 비판하는 것.

 

- 경덕왕은 정치적 타협을 위해 녹읍을 부활 시키기도 하였다.

- 한화정책 : 9주, 군현의 명칭, 관직, 관청명을 漢式으로 바꾸었다.

 

3. 기파랑의 존재

- 시중 김기가 기파랑이라는 설이있다.

- 김기는 경덕왕 14년에 시중으로 취임하여 3년간 재직했다.

- 같은 해 7월 경덕왕이 죄인을 사면하고 노질과 환과고독을 위로 했다. 김기의 취임과 맞물려 백성 구제책을 편 것인데, 기파랑 가사 내용과도 일치한다. (기파랑의 마음 끝은 시냇가의 조약돌 같은 수 많은 백성을 구원하는데 있음)

 

- 기파랑은 좌편향 왕당파 출신의 화랑의 모습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신라 중대의 이상적 화랑상)

(c.f) 왕당파 vs 친왕파 vs 반왕당파

화랑은 골품제 모순의 해소를 통한 사회통합, 국가 통합의 기능을 한다.

- 김기는 국왕의 신임을 받고 백성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인물로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김기가 화랑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통합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 김기와 화랑이 합쳐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c.f) 기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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