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동명왕편과 고려의 천하관

Varsika 2023. 12. 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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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명왕편

- 고려시대 이규보가 26세(1193년)에 지음

- <구삼국사>를 참고함. 

<구삼국사>는 고려 초 편찬된 관찬사서이나 현전하지 않는다. <구삼국사>는 유교적 관점이 없어 동명왕 본기에서 신화와 설화적 내용을 모두 담았다.

 

동명왕편은 국내 정치적 요소를 떠나서 신라 계승의 역사의식에 반대하고 그에 대치하는 고구려 계승 역사의식의 표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더 중요한 것은 이규보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과 주변 문화권과 교류하는 맥락 속에서 국제적 위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하는 천하관과 연결된다. 

 

(c.f)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구삼국사> 및 중국의 기록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며 유교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 동명왕편 내용

- 중국의 신화적 인물들

-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등장

- 유화와의 결혼

- 동명(주몽)의 탄생과 성장, 동명의 건국 - 국력의 신장 - 등천

- 아들 유리의 승계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주몽 내용과 비교하면 동명왕편의 내용이 자세함

 

2. 동명왕 신화 

5세기경 부여, 고구려, 백제의 시조 설화의 주인공이었던 동명이 독자적으로 천하의 중심임을 주장하는 고구려의 시조겸 국가 수호신으로 여겨짐. 

* 부여: 기원전 2세기 ~ 494년(고구려에 의해 멸망)

* 고구려: 기원전 37년 ~ 668년

 

<삼국유사>

해모수: 천제의 아들로 북부여를 세움

해부루: 해모수의 아들

동명제: 고구려를 세움

 

<동명왕편>

해모수: 천제의 아들

동명: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 고구려를 세움(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언급없음)

유리: 동명의 아들

* 부여왕 - 해부루(동명과 별도로 해부루를 언급함)

* 광개토대왕릉비(5세기 제작)에서도 추모왕(주몽)은 해모수의 직계라고 표현함.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부여계가 약해지면서 발생한 일로 추측할 수 있음.

 

3. 고려의 천하관

- 동명신화가 토속신앙과 함꼐 전해짐

세상에서 동명와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 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함.

 

- 고려가 중국과 견줄 수 있는 신성한 나라라는 고려 천하관이 성립

고려도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으로, 중국만 황제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도 천제의 아들 주몽의 후예다.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神異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 ㄴ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 12세기 현종 시기, 토속신에게도 동명왕의 이름을 붙임. 숙종 때는 동명성제라고 높여 부르기도 함

 

- 김부식과는 다른 다원적 천하관으로 국왕을 천자, 황제로 지칭하였다. 고려가 천명을 받은 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국가 임을 천명함.

→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니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리랴. 김부식 공이 국사를 중찬할 때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이규보의 말)

 

4. 기타

- 이규보를 유학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 물론 완전한 유교학자라기 보다는 유교, 불교, 도교를 상호보완하여 사용함.

- 鬼, 幻으로 취급받던 이야기를 神聖한 것으로 해석하자고 주아함. 귀와 환은 토속신앙과 연관이 깊은 미신적인 측면이 있다. 

- 국가적으로 신성시 되는 제사인 동시에 무속적인 부분도 큰 부분을 차지함. 

 

○ 이규보와 김부식의 역사관, 신화관, 천하관 차이

- 김부식은 중국의 토속신앙과 제례법에 뿌리를 둔 유교적 신격을 긍정하고 중국신화들을 긍정하면서도 고려 자체의 토속적인 신격이나 신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신라 계승의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건국신화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가졌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김부식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화이론적 천하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 이규보는 중국신화만을 신성하다고 주장한 김부식의 의견과는 반대적 입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직 고려만 중요하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원적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소중화론적 색채가 보이기도 함 -  이 부분은 고려 전기 다원적 천하관과의 차이점)

 

이규보 역시 유교적 관념이 뿌리 깊은 사람이었다. 상고신화에 대한 인정과 긍정 수준이지 이규보의 역사의식을 신이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후대 역사인식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김부식과 다른 유교계통일 수도 있고, 일반적인 산화에 대한 인식 차이라기보다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차이, 천하관에 대한 인식 차이라고 할 수 있따. 

 

- 동명신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천하의 중심으로서 고려의 역사적 전통을 고대에까지 확대하여 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 화이론적 천하관에서 문화의 기준은 곧 중국의 문화이고, 소중화란 그 문화를 잘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다원적인 태도는 중화의 기준을 준수하되, 지역이 다르고 인성이 다르므로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c.f) 유교이념과 함꼐 이규보는 다신론적 신관을 가졌지만 미신을 배척하는덴 확고했다. 

 

-

 

* 요, 금, 송, 고려가 공존한 고려 중기의 천하관으로 다원적 천하관이 존재한 듯 보인다. (외부적으로는 왕이지만 고려 내부적으로는 황제로 부르고, 이러한 외왕내제 개념을 고대까지 소급적용하려 했던 행동의 일환으로 동명신화를 연구한 것으로 보임)

 

-

 

(1) 왕건 - 다원적 : 시대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을 수용하되, 전통과 토속예법을 모두 존속시켰다.

 

(2) 최승로 - 화이론적 :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의 제도는 준수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모조리 그것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군신부자의 도는 마땅히 개혁하고, 나머지 의복 등의 문제는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

* 최승로의 주장은 '화하'라는 가치 판단이 들어간 용어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모둔 예법과 제도를 중국에 맞추어 바꾸자고 주장하였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바꾸자). 즉 중국의 문물ㅇ느 문물 그 이상으로 평가한 것이다. 

 

(3) 이규보 - 소중화론 : 소중화론이지만 송에 대한 높은 평가는 북방왕조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규보의 소중화론은 사고에서 그리 깊이 검토되지 않은 것이 일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최승로나 김부식의 화이론적 사상에 비하면 이규보의 천하관과 전통문화관이 비교적 자주적인 측면이 있자믄 그의 사고 역시 중국문화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중국것에 견주어야 그 의미가 살아나고, 정당성이 부여되는 분위기가 당시 고려에 분명히 존재하였고 이규보의 사고도 그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중국 고대 신화에 대해 긍정하면서 그것에 견주어 동명신화의 타당성을 내세우는 논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 한 시대 가장 앞선 선진 문화라도 한계가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단순한 복구의식이 아니라 당시 신화와 신앙에 대한 비평적 재평가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행위는 바로 유교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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