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작제건 설화와 고려 건국

Varsika 2023. 12. 24.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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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제건

왕건의 할아버지

 

* 작제건 설화의 내용

동생 보육이 소변을 보아 삼한을 덮는 꿈을 꾸었고, 이후 형의 딸과 결혼하여 두 딿을 낳는다. 큰 딸이 아관산에서 오줌을 누니 천하가 잠기는 꿈을 꾸었고, 이 꿈을 동생 진의가 산다. 진의와 당나라 황제가 인연이 닿아 동침하였고 작제건을 낳는다. 

 

작제건은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에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바다에 버려지고, 서해 용왕을 만난다. 용왕은 작제건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여우를 처치해달라고 부탁하고 작제건은 여우를 죽여 다시 용궁에 초청된다. 용궁은 용녀를 작제건과 결혼시킨다. 작제건은 칠보와 돼지를 갖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갖고 온 돼지가 송악까지 걸어가 그곳에서 멈추니 돼지를 따라가던 작제건도 결국 송악에 자리를 잡는다.

 

* 진희가 언니의 꿈을 사는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김유신의 누이 동생 문희, 보희의 '매몽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희의 아들이 삼국을 통일한다. 

 

용녀와 결혼하는 내용은 마찬가지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거타지설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거타지 설화 : 활을 잘 쏘던 거타지가 당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혼자 남게 되었고 용왕의 청으로 여우를 처치한 후, 용녀와 결혼한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던 중 한 섬에서 풍랑을 만나 고립된 일행들은 궁수 한명을 두고 출항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는 거타지를 섬에 남겨둔다. 홀로 남은 거타지에게 한 노인이 와서 자신이 서행의 용왕인데 밤마다 한 스님이 주술을 부려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하니 도와달라 말한다. 해뜰 무렵 스님이 나타나자 거타지가 활을 쏴 죽였는데 죽은 스님은 여우로 변하였다. 용왕은 하나 남은 딸을 거타지와 혼인시키고, 꽃으로 변하게하여 거타지가 용녀를 데리고 섬을 떠난다. 거타지는 신라로 돌아와 용녀와 결혼한다. 

 

 

2. 왕건의 고려 건국

* 왕건은 돈은 많았으나 신라 제도권 기준으로는 벼슬도 없는 사람이었음

 

- 고려 왕계의 우수성 : 당나라 황제, 용왕의 사위

* 신라 왕실을 보호하고 계승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c.f) 김유신은 가야계임에도 불구하고 진골로 우대받았다. 나머지 가야계 중에선 그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신라는 왕경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귀족으로 취급하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따라서 왕건도 신라 말기인데 개경에 사는 것으로 보아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개경 지방의 촌주(세금 전담 공무원)을 하기에도 경주와 개경은 너무 멀다. 이러한 배경을 미화하기 위해 작제건 설화를 만든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성골장군, 산시, 당나라 황제, 용왕 등)

 

- 작제건이 물과 밀접

해상무역(신라말 호족 장보고도 마찬가지)

 

- 별자리와 관련된 부분은 제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묘사함

 

- 치성광여래 : 북극성을 의미, 제왕의 탄생(하늘에서 떨어지는 별)

- 돼지 : 제왕의 즉위를 의미, 별자리 규수를 의미 - 도읍, 제왕, 교사(하늘에 제사지냄)

- 유리명왕(21년) - 하늘에 제사를 쓸 돼지가 도망가 국내위나암에서 잡았다. 그곳의 산수와 토지, 산물이 국도로 적합하여 그곳으로 국도를 옮겼다. 

 

(c.f) 지팡이 : 왕의 상징성. 작제건 설화에서 3대 후에 왕이 되니까 지팡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보다 치밀하게 제작된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 별자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아 민간에서 bottom up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군처럼 top down 방식으로 만들어진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3. 설화 작성 시기

(1) 고려 초 -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하늘의 뜻

(2) 의종 때 - 김관의가 의종 때 관료임, 서경 천도론을 우려하여 국내외적인 위기 상황에서 왕실 신성화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닐까. 김관의의 기록이 최초인 것으로 보아 당시는 고려 왕실의 권위를 제고할 필요가 있었던 시기가 아닐까.

>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이때 기록한 것인가

> 아니면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 설화를 만든 것일까.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 필요함)

* 백두산 - 송악

* 의종 직전인 인종 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있었고, 서경 천도를 우려하여 개경(송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설화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거는 미비하지만 추측) "그 지역의 덕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 의종대 무신의 난(보현원 행사에서 일어남, 보현원은 의종이 자주 행차하던 곳 중 하나다.)에서는 궁궐이 다 타버리고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금나라가 성장하고 있었고, 개경의 문신세력은 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c.f) 고구려 백두산과의 연관성 + 정통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함. 아마도 고려 초기 만들어졌으나 의종 떄 짜깁기를 통해 집대성한 것이 아닐까 추측함. 

 

4. 기타

 

* 궁예 - 3국을 아우르지 못했다. 후고구려는 고려 건국의 단서에 불과했다. 반면 왕건은 속국을 아우르는데 성공했다. 호족 출신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고려 건국의 힘은 호족들로부터 나왔다.

 

- 호족들은 중앙 정치 권력은 장악하지 못했으나 지역에서 경제적, 군사력 힘은 막강했다. 정치적으로는 낮은 신분이었다. 반면 궁예는 독특하게도 왕자 신분이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이 잃었던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아주 컸다. 후고구려 건국 후에는 호족을 배려하지 않았다. 궁에든, 견훤이든 건국 당시 지역 호족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건국 이후 호족들이 원하던 정치력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방식은 호적세력의 포섭과 연계르

 

철원에서 개경으로 후고구려의 수도가 옮겼을 때에는 왕건 등 호족 세력의 영향이 컸고, 다시 철원으로 복귀하였을 때는 왕건파를 배척하고 청주파를 등용하였다. 거기다 정적을 제거할 떄는 제도와 기구를 이용한 탄액이 아니라 관심법으로 직접 정적을 제거 했다. 이러한 궁예의 독단적인 모습은 과거 장군으로 추대될 때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부인쪽 외척 세력이 궁예의 노선에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건도, 견훤도 모두 호족 세력의 딸과 결혼했다. 궁예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부인과 자식을 죽여 외척을 견제하고자 했을 수 있다. 부인을 죽인 이유가 간통을 했다는 사유였는데 아들까지 죽인 점을 미루어볼 때 이런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반면 왕건은 호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호족 세력을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왕건은 나주 세력과도 사이가 좋았는데(부인 나주 오씨), 아마 해상무역을 하면서 고려 건국 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작제건 역시 신라 말 장보고와 마찬가지로 해상무역세력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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