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정과정곡과 의종대 정치

Varsika 2023. 12. 2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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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과정곡은 거문고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뜻한다.

*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누가 불렀는지 밝혀져 있다. (정서 作)

 

1. 정과정곡

"님을 그리워하여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바로 봄철 산의 두견새와 비슷하네. 사람들이여 옳고 그름을 묻지 말라 지는 달과 새벽 별 만은 알아 주리."

<고려사> - 이제현의 한역시 / <악학궤범>에는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 조선 성종 16년인 1485년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에도 가사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 조선 성종 24년인 1493년 성현, 유자광이 편찬한 음악이론서 <악학궤범> - 삼진작에는 우리 말로 기록되어 있다. 

* 삼진작은 tempo 단위이며 일진작이 가장 느리고, 이진작, 삼진작, 사진작순으로 빨라진다.

 

"내가 임을 그리며 울고 지내니 산 접동새와 난 처지가 비슷하구나. 나에 대한 말은 진실이 아니며 가짓이라는 것을 아! 지는 달 새벽 별만이 아실 것이리. 넉이라도 임과 함꼐 가고 싶습니다. 아아! 내 죄 있다 우기던 사람이 그 누구입니까 나는 과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나에 대한 뭇 사람들이 거짓말이여. 슬픈 일이로다, 아아! 임이 나를 아마 잊으셨는가. 아아, 님이여! 내 말씀 다시 들으시고 사랑해 주소서"

 

2. 정서鄭敍

정과정곡을 지었으며(고려사에 기록),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서는 인종비 공예태후 동생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인종 사후 의종이 즉위하자 동래로 유배 당했다. 의종의 동생 경暻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았다. 정서는 성격이 경박하고 재예가 있었다. 대령후 경과 사귐을 맺고 서로 놀았다. 

 

예부시랑 겸 한림시독학사였으나 내시낭중으로 강릉되어 유배를 당한다. 의종은 유배가 조정의 여론때문이라며 곧 다시 불러줄 것을약속했으나 불러주지 않았다. 명종 1년(1170, 무신의 난 직후) 유배에서 풀려난다.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거문고를 타며 정과정곡을 노래한 것이다. 정과정곡에서의 임은 의종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명종이라는 설도 있다. (유배지에서 풀려나기 위한 방편으로 정과정곡을 만들었다는 설)

 

의종은 환관 출신인 정암이란 자를 총애했는데, 환관 출신에게 이례적으로 일반 문관직 벼슬을 내렸다. 극심한 반대로 인하여 결국 철회되었는데, 정암이란 자가 여기에 앙심을 품고 자신에게 반대한 이들을 모두 모함한 사건이 터진다. (의종 5년)

 

정서의 성격은 놀기 좋아하고 재주가 많은 예인인데 굳이 임금인 의종을 공격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마 모함을 당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실제로도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음), 

 

* 정과정곡을 지은 시기

의종 5년(1551) -> 동생 추대 논란?

의종 24년(1170) -> 의종 폐위시기?

 

3. 의종대의 정치

- 인종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왕실 권위가 약화됨

이자겸은 인종이 어릴 때 난을 일으켜 전권을 휘둘렀다. 이후 십팔자위왕설을 퍼트리다 척준경에 의해 죽는다. 

 

- 즉위 초 금나라, 송나라와 연계하여 왕실 도모 사건(금나라를 치는 척, 고려를 처달라라는 요청이 송에 접수됨, 금나라에게 고려를 쳐달라는 요구도 접수됨)

묘청의 난 진압 후에도 서경 세력은 잔존했다. 이들과 개경 세력의 알력다툼이 심했고, 서경세력은 금나라를 끌여들여 정권을 찬탈하려 했다. (사형 당함)

 

- "  서경인 李淑·柳赫 등이 金의 祭奠使가 돌아갈 때 附書하여 “대국의 군사가 바로 서경에 이르면 청컨대 내응하겠다”

- 李深·智之用 등이 송나라 사람 張喆 등과 모의하고 송의 태사 秦檜에게 글을 통하기를
“만약 금을 치겠다는 명목으로 길을 고려에 빌리기만 하면, 우리가 내응할 터이니 그러면 고려도 가히 도모할 수 있다”

 

- 의종은 격구를 즐김

 

-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 안정을 위해 현릉(왕건)과 창릉(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에 참배하고, 서경에 중흥사를 창건하였다. 백주에 별궁을 창건했다. (백주는 황해도 연백의 옛지명)

- 부처나 여러 신에게 의존하였다. (유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 문신들에게 자기과시를 했으며, 1170년 무신난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3년 후 김보당과 손을 잡고 김보당의 난을 일으킨다. 무신의 난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의민이 의종을 죽인다. 이의민은 한 때 왕에게 충성하던 사이였으나 의종의 등뼈를 뿌러트려 죽였다고 기록에 나온다. (이의민은 무신의 난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c.f) 작제건 설화도 이때 쓰인다. 왕실에 대한 포장이 필요한 시기.

 

-

 

고려 초기 무신의 영향력은 컸다. 고려 중기로 넘어오면서 김부식 등 경주계를 비롯한 문신의 힘이 커졌다. 의종은 다시 무신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했던것 같다. 왕권이 약했고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문신들이 무신들을 더 깔보고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결국 무신의 난을 촉발시켰다.

 

실제로 무신에서 가장 높은 상장군이 정3품에 불과했고, 윤관과 김부식 등 굵직한 지휘관들은 모두 무신들이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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