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은애전과 정조

Varsika 2023. 12. 1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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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은애전(銀愛傳)

    정조 14(1790) 전남 강진에서 김은애가 노파를 죽인 살인사건을 소설 형식으로 옮긴 글 신여척 살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음

 

  * 사건의 내용

    김은애(18세)는 양가집 딸이었는데 안노파가 자신의 시누이 손자인 최정련과 맺어주고 부스럼 약값을 받기로 함

   정련에게 은애와 사통했다고 말하게 하고 노파는 은애가 오히려 정련을 좋아하여 중매를 부탁하였다고 소문을 퍼뜨림

   은애는 이 일로 한동안 혼인하지 못함. 소문을 믿지 않은 김양준과 결혼

   결혼 후에도 노파는 은애를 무고

   정련에게 약값을 못 받아서 병을 고치지 못했으니 은애는 원수임

   은애는 2년여의 시달림에 지쳐 안노파와 최정련을 죽이기로 결심

     - 안노파를 살해, 18차례나 찔러 살해함

 

  * 은애전의 저자

     이덕무(李德懋:1741~ 1793)

     정조의 명에 따라 김은애 사건을 소설의 형식으로 지어바침

     서자로 규장각에 근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정조2;1778)

     * 서자 출신이며 북학파(농업보다는 상업으로 부국강병을 추진, 청나라 문물을 도입 주장)

 

2. 사건의 판결

  * 현감의 보고서 → 관찰사 윤행원

    형조 : 사형을 면해 줄 수 없음 

    정조 : 참작의 여지가 있음  → 체제공의 의견을 묻도록 지시

 

체제공 :  은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음. 단 노파를 살해한 것은 사형에 해당함

      - 이장이나 관청에 알려 처벌해야 함. 사적인 복수는 불가함 

 

    정조 : 은애를 석방하도록 명함

         은애의 행위가 마땅함, 여성의 정조 - 안 노파를 죽임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킴. 최정련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도록 함

 

3. 정조 판결의 의미

  * 법과 예교(禮敎) 가운데 예교를 선택

     - 예교와 관련된 사건은 예교편에서 판단함.(고정적인 법의 틀을 벗어나 판단함)

        신여척 사건의 예

* 신여척 사건: 전남 장흥에 김순창, 김순남 형제가 살고 있었다. 성격이 포악한 형 순창은 평소에도 동생 순남을 괴롭혔는데 어느날은 보리 두 되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순남을 도둑으로 몰았다. 단순히 모함한 수준이 아니라 절구공이로 거의 죽이다시피 때려놓았는데 이를 듣고 신여척이 순창을 말리러 온다. 김순창은 적반하장으로 신여척을 폭행하였고 신여척도 김순창의 배를 걷어 찼는데 내상을 입은 것인지 김순창은 다음날 죽고 만다. 고의성이 없었지만 명백한 살인이었던 탓에 사형에 처해질 위기였는데 정조의 도움으로 방면된다. 

 

     백성들에게 유교 이념을 따르도록 함

      - 유교 이념을 사회 질서로 인식

 

* 김계손 김성손 형제의 살인(1788)

          아버지가 김응채와 부채문제로 시비. 발길에 채여 이튿날 사망

         - 2년 동안 조사(해당 사건으로 죽은 것인지 본래 지병이 있었는지 등)

         김응채의 무죄 석방, 김응채는 은거함

         - 한 해 넘게 추적하여 김응채 살해

         - 계손 형제 석방, 특별 등용 

 

* 『속대전』- 복수에 대한 처벌 조항(영조때 편찬됨)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구타당하여 중상을 입었을 때 아들이 그 사람을  구타

       하여 죽게 만들면 사형을 감하여 유배 보낸다.

     아버지가 피살되었는데 조사가 끝나기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면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낸다.

 

      부인이 남편의 원수에게 보복하고 어머니가 아들의 원수에게 보복하여

        제멋대로 죽인 자는 장 60에 처한다.

      출가하지 않은 딸아이를 겁탈한 자를 부모가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을 경우, 100에 처한다.(여성의 정조가 중요하므로 이를 해하는 자를 살해하는 것에 대한 참작)

 

  * 정조의 사도세자 명예 회복

       부자간의 의리상 아들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당연함 - 인식의 확산

김계손 형제 사건을 보더라도 비록 아비의 죄가 있을지 언정 그 아비를 기리고, 또 아비를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무죄석방도 모자라 효행이 뛰어나 널리 알려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도세자의 경우로 보자면, 사도세자는 분명 기행을 하거나 처벌 받아 마땅한 잘못을 한 이력이 있음.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기에 그 처벌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임. 따라서 정조는 그 앞단의 문제는 차치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는 것을 법으로만 따지면 안된다라는 예교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임. 

 

2. 정조의 개혁정치

정조는 즉위 원년부터  5년간은 규장각 등을 설치하여 정적을 제거하였다. 이후 군권을 장악하였고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즉위 10년 이후에는 본격적인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정조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사회 변혁기였다. (신윤복의 그림도 정조대 나옴) 정조는 새 시대에 맞는 유교 질서를 확립하고자 이러한 판결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무너져 가는 성리학 체제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 그리고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은애전을 저술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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