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하여가, 단심가와 고려말 정치

Varsika 2023. 12. 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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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당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 까지 누리리라"

-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온 1392년 이방원이 지은 시조

 

2.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하여가에 대한 정몽주의 답시.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암살됨(1392년)

- 변중량 (卞仲良)이 정몽주에게 이방원의 암살계획을 알렸으나 정몽주는 이방원을 만나러 갔고 결국 피살되었다. 

 

* 고려 말 공민왕은 기황후 세력을 제거하고 친명 정책을 펼쳤다. 이에 반발한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킨다고 발표하였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었으므로 결국 복위시키게 된다. 우왕 대에는 권문세족(친원 세력)이 정계에 복귀하였고 명나라 사신 살해사건이 발생하는 등 명과의 외교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친원 / 친명 정책을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은 친원정책에 반대했고 결국 유배에 처해지게 된다. (우왕 2년). 정도전은 9년간 유배생활을 한다. 정몽주 역시 신진사대부에 속했으나 친원세력과 정면충돌은 하지 않았기에 유배생활을 겪지는 않았다. 

 

* 공민왕 때 개혁을 주도한 신돈은 성균관을 중영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배출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신돈이 사망한 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제거되었고, 다시 권문세족들이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3. 이방원과 정몽주

 

(1) 이방원(1347 ~ 1422)

우왕9년인 1383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었으며 아머니 한씨 소생의 6남 중 하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후 정도전의 공신 견제정책에 따라 개국공신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때 동복형을 제거하였고 이후 세자로 책봉되었고 결국 왕으로 즉위한다. 

 

*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 완성하였고, 총재 중심의 정치를 강조했다. 세자의 스승으로도 활약했고 사병혁파를 통해 중앙군을 편성, 요동정벌을 기획했다. 반면 정도전이 사망한 이후 이방원은 6조 직계제를 시행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2) 정몽주(1337~1392)

집안 자체는 평범했으나 개인의 능력으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 9년인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색의 문하생이었는데 정도전, 길재 모두 이색의 문하였다. 홍건적을 물리친 김득배의 문생이기도 했다. 공민왕 때 김득배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자 문생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 김득배는 문신이었으나 무관직을 겸했다. 이는 고려말 문신들의 공통적인 역할이었다. 무관을 겸직하지 않은 사례는 이색이 있다.

 

* 길재는 고려가 망한 이후 초야로 돌아갔다. 길재로부터 김숙자 - 김종직 - 김일손으로 이어지는 사림이 형성된다. 

 

정몽주는 이성게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였고 공양왕 옹립을 지지하였으나 조선왕조 개창에는 반대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주장한 사회문제 해결에는 대부분 찬성하였으나 고려라는 나라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3. 고려 말의 정치

(1) 정몽주의 이성계 세력 탄행

-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남재 등의 유배(1392년 4월)

* 조준은 훗날 정도전과 요동정벌 문제로 갈라서게 된다. 

 

* 토지개혁과 고려 말의 정계 개편

조준은 훗날 조선의 경제개혁을 주도한 경제통이었다. 토지제도에 대해서 소유권을 인정하되,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의 사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안을 제시했다. 경기도에 한정하여 과전을 주는 방식으로 관리들의 월급 체제를 정비하기도 했다. 

 

정도전은 토지개혁에 있어 농민들에게 무조건 토지를 준다는 방향을 제시하였고, 국가에서 토지를 유/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분배하는 안을 제안했다. 이는 사유지의 국유지화를 뜻하는 것으로 해방 이후 북한이 실시한 토지개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공민왕 시기 신돈의 개혁 전,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것은 무사계급이었다. 덕흥군의 난, 홍건적의 난을 거치면서 전란에서 공을 세운 무신들에게 공신전을 지급하였는데 서류상으로만 지급한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많은 토지를 지급했다. 최영과 이성계 또한 이런 기류 속에서 성장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후에 신돈을 내세워서 무신계급을 지방으로 축출하였고 이는 왕권강화로 이어진다. (공민왕 15년 전민변정도감 설치 - 판사로 신돈 임명). 이 시기 공민왕의 충신이라 할 수 있는 최영 역시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외곽으로 쫓겨난다. 훗날 신돈이 제거된 이후에는 무신들이 잠시 권력의 중심으로 다시 부상하였다가 권문세족이 득세한다. 우왕은 이인임을 중심으로한 우왕 추대세력과 최영을 중심으로한 무장세력에 의존했다. 이성계는 당시 가문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무신세력 이후 주류로 등장한 권문세족 세력에 포함되지 못한다. 이후 최영과 이성계가 다시 손을 잡고 권문세족을 몰아냈고 이성계는 2인자가 된다. 

 

- 당시 이성계는 세자 서(왕서, 정성군)를 맞으러 황주에 다녀오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 정몽주는 개경에 복귀한 이성계를 문병한다는 구실로 방문하였다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사병인 가별초 중심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388년 고려의 요동정벌에 반발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였고, 대립한 최영을 고봉현(지금의 고양)으로 귀양보냈다. 훗날 최영은 충주에서 참수된다. 

 

이성계는 고려에도, 원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세력으로 동북면을 기반으로 가별초라 불리는 자체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앙군과 다르게 유대감이 강력했고, 고려, 원, 여진까지 여러 세력과 교류했다. 선조인 이자춘때부터 동북면으로 넘어오는 실향민을 잘 거두어 세력을 키웠다. 이러한 이성계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자 최영이 장마철에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강행했다는 설도 있다. 정작 총사령관인 최영은 요동정벌에 참여하지 않고 평양에 남아있었다는 점 역시 이러한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성계 세력이 아니면서 회군에 동조한 무장들에 의문을 품기도 하는데, 이성계의 가별초를 제외하고는 요동정벌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화도 횐군 직후 이성계의 가족을 잡으러 고려 조정에서 사람을 보냈으나 이미 피신한 뒤였는데 이러한 정황은 회군이 사전에 계획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선 개국 이후 이성계와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도모한 것을 보면 회군시 내세웠던 사대의 명분은 그저 회군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려 말 요동정벌 때는 사대의 명분을 앞세워 정벌에 반대했으나 조선 개국 이후에는 요동정벌을 내세워 사병혁파를 추진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전략으로 보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군권을 바탕으로 정권을 정악한다. 폐가입진을 내세워 우왕을 폐위했고, 우왕은 강화도, 여주, 강릉으로 귀양가게 된다. 우왕은 1389년 11월, 최영의 생질인 김저에게 곽충보를 찾아가서 함께 이성계를 몰아내는 거사를 도모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곽충보가 이성계에 밀고하여 발각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창왕도 폐위도고 서인으로 강등된다. 1398년 11월, 공양왕이 즉위하였다. 

 

* 폐가입진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의미인데, 이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기반한 것이다. 우왕이 궁 내에서 살다가 즉위한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다만 실제로 우왕과 창왕이 즉위할 때는 이런 논란이 없었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시점에 제기된 점을 미루어볼 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명분일 수 있다. 실정으로 비판을 받은 것은 우왕인데 그의 아들 창왕까지 폐위시킨 점, 폐가입진으로 우왕을 몰아낸 이후 그의 자식인 창왕을 옹립한 점 역시 의혹에 무게를 더한다.

 

우왕은 15년간 재위했고, 창왕은 2년간 재위했다. 이들이 재위한 동안에도 왕씨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없었으나 김저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달 만에 두왕과 창왕 모두 피살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훗날 기록된 공민왕의 기행 역시 우왕/창왕의 신돈 자손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고려사는 조선에서 편찬되었다. 또한 노국공주가 출산 중에 사망하였으므로 공민왕이 성불구라는 주장 역시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 이색은 창왕 옹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공양왕의 즉위는 이색의 몰락을 뜻한다. 거기다 과전법이 시행되면서 권문세족과 함께 이색 역시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된다. 반대로 정도전과 뜻을 같이 하는 신진사대부들은 경제적 기반이 생기게 된다. 

 

 

(3) 공양왕(공양왕은 이성계의 인척이다)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 왕요다.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 일파에 반발해 명나라 주원장에게 이성계를 무고한 윤이, 이초의 음모사건(1390년 5월)이 발생한다.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이르기를 이들이 이성계가 명나라 정벌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를 반대한 이색 등 고려 재상 19인을 살해하거나 유배보냈다고 명 황실에 고했다는 것이다.

* 이성계 세력은 1391년 1월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이성계가 삼군도총제사에 임명되고 정도전은 우군총제사에 임명된다. 

 

정몽주는 이러한 상황에서 윤이, 이초의 음모사건으로 논해하는 자는 무고로 논할 것임을 발표한다. (1391년 9월) 윤이와 이초는 별다른 관직도 없는데 어떻게 명나라 황제에게 이성계의 죄를 고할 수 있냐고 물으며윤이와 이초의 죄를 묻는 자들은 오히려 윤이와 이초에 대한 무고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적을 제거하고 빈 관직을 자신의 세력으로 채운다. (권근 역시 이 때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 이후 태조 2년에 북귀한다.)

 

윤이, 이초의 음모사건을 기점으로 정몽주는 이성계와 다른 노선을 가게 된다.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이 고려 개혁이 아닌 다른 뜻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

 

정몽주는 사후 추증되었고 조광조 등의 사림 세력에 의해 16세기에 더욱 추앙받는다. 어찌보면 조선시기 정치세력에 의해 많은 재해석이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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