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와 한국문학] 답전부와 정도전 / 산가서와 길재

Varsika 2023. 12. 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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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전부

"그렇다면 그대의 귀양 온 죄목을 알겠노라. 그 힘의 부족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말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해 위를 거슬린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로다. (...) 그대는 한 몸으로 몇 가지 금기를 범했는데 겨우 귀양만 보내고 목숨은 보전하게 하였으니, 나 같은 촌사람이라도 국가의 은전이 너그러움을 알 수가 있도다. 그대는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오. (<삼봉집> 권 4 답전부)

 

2. 정도전(1342~1398)

아버지 정운경은 정3품 형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고려 초 호족의 후손인 향리로 보이고 직계 선조 중에서는 정운경이 첫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외할머니는 종의 딸이었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우현보의 먼 친척인 김전이 노비의 아내와 사통 하여 낳은 딸이라는 설이 있었다. 당시에는 매우 엄격한 일천즉천제를 실시했지만, 돈을 바치면 노비도 양인으로 만들어주는 납속책 역시 존재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노비에서 양인이 되는 것은 그다지 큰 제약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훗날 정도전이 탄핵당할 때는 그의 외할머니 문제가 크게 제기되었다. 이는 훗날 정도전이 고려를 멸망시키는 동기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노비의 후예라는 형식의 문제와 부족한 명분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 납속책이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세금 부담으로 인하여 토지를 보유한 양인이 귀족의 노비로 자신하여 들어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공민왕 11년인 1362년에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1375년부터 1377년까지 유배생활을 보낸다. 친원 외교에 반대한 것이 그 사유였다. 우왕 9년인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갔고, 1384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같은 해 전의부령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전제개혁을 진행하였으며 불교를 비판하였다. 마침내 1392년 재상중심제도의 조선을 개국하였으나 1398년 이방원에게 피살당하였다. 

 

* 정도전에 유배가 있을 당시 정몽주는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였고 1384년 정도전을 전의부령으로 임명하고 명나라 방문길에 동행하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정도전은 정계에 복귀한다. 

 

*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c.f - 최승로)했다. 불교 사찰이 갖고 있던 토지를 몰수했다. 불교의 윤회도 부정하였다. "샘에 물이 그치지 않지만 어제 뜬 물과 오늘 뜬 물은 갖지 않다. 봄마다 새 잎이 나지만 지난 잎과는 다르다."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충과 효)을 채택했다. 

 

길재가 사림의 시초라면 정도전은 관학파의 시초로 여겨진다. 관학은 현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사림은 명분을 중시하고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며 부정부패척결을 중시했다.

 

정도전은 나주 거평 부곡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부곡은 일반 적인 현 주민들보다야 힘든 생활을 하지만 천민 집단으로 보는 것은 의견이 분분하다. 흔히들 향, 소, 부곡이라고 묶어 지칭하는데 소는 노동력을 주로 제공했고(종이, 철) 부곡은 농업지역이었다. 정도전은 나주에서의 귀양 생활이 후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전까지 갖고 있던 '하늘의 뜻'을 믿고 기다리지 않고 일을 크게 도모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깨닫는다. 

 

정도전이 귀양생활을 할 때 성균관 사대부 학우들은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를 마음이 아니라 세력만 보고 친해진 무리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당시의 성균관 사대부 역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짐나 여유가 있었던 이색조차 정도전을 돕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점이 섭섭했을 것이다.

 

3. 산가서

"(...) 내가 지정 연간(1341~1367)에 여기다 집을 지었더니 이제 십여 년이 지났는데, 속세의 손님은 오지 아니하고 세속의 소식도 들리지 않으니 나와 벗하는 이는 산승뿐이요, 나를 알아주는 것은 물새뿐이로다. 명예에서 오는 영화로움과 이익을 위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고을의 태수조차 있건없건 알 필요도 없이 피곤해지면 낮잠 자고 즐거우면 시를 읊고, 다만 해와 달이 오고 가고 시냇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만 볼 따름이다. (...)"

 

* 후산가서

"이제 와선 불행하게도 하늘이 무너지는 때를 만나 십 년 공부가 쓸려버리고 말았다. 슬프다. 하늘이 하는 일이니 무엇이라 이르리오. 그러므로 방황하고 탄식하다. (...) 세상 밖을 방랑하며 살아 그 시대의 책임을 몸과 마음을 바르게 보전함만 같지 못하니 이러고 보면 과연 하늘을 지르고 우주 밖으로 벗어져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

- 시대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표현함

- 정도전 역시 유배 초기에는 '하늘이 하는 일이니 무엇이라 이르리오.'와 비슷한 말을 했다. 

 

4. 길재(1353~1419, 사림의 초두)

아버지 원진은 금주지사를 역임했다. 금주지사는 그리 높은 관직이라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길재의 집안은 가난했다. 길재는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였고 1386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길재는 이방원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들 모두 우왕 시기 관직에 몸담았다. 1389년에 문하주서에 임명되었다. 후에 계림부와 안변 등의 교수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390년) 

 

조선이 개국된 이후 정종 2년인 1400년, 태상박사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 태종 때인 1403년 길재의 생계가 어렵다는 소식에 지군사 이양이 전답을 주었으나 조그마한 땅만 받고 돌려보냈다. 이처럼 태종은 길재를 정계로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길재는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자식의 관직 진출을 인정했다. 자식들은 고려 때 관직에 나간 적이 없으므로, 불사이군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권근은 태종 때 벼슬길에 나갔다. 권근은 여러 차례 "나의 수하 중에 길재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말했다. 길재와 정몽주가 직접적으로 친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근의 직계 사대부였다. 이방원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조선 개국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권근은 윤이 이초의 옥사로 인해 유배 중이었기에 조선 개국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권근은 조선 개국 직후 관직에 나아갔으나 길재는 끝까지 불사이군을 지켰다. 세종 대에 이르러 길재의 아들이 관직에 나갔다. 

 

* 사림의 계보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길재가 경상도 선산사람이었던 탓에 이들을 가르치는 것 역시 선산에서 이루어졌다. 

 

사림은 대부분 대관직에 주로 진출했으며 훈구파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성종 때 사림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조 때 공신이 지나치게 정치를 장악하자 견제책으로 사림을 등용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사림의 간언을 싫어해 사화를 일으켜 사림이 큰 피해를 보았다. 

 

* 원간섭기에는 원의 농사기법과 종자를 수입했다. 개간을 진행하고 소금에 강한 종자를 심었으며 소금의 짠기를 빼는 기술을 도입했다. 이러한 노력은 농산물 수확량 증가에 큰 기여를 했다. 물론 그래도 기근에 시달리는 고려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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