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들/독서

하얼빈(김훈, 문학동네)

Varsika 2023. 12. 27.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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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적 배경과 사실

- 하얼빈은 당시 중국의 영토였으나 러시아가 하얼빈을 지나는 남만주철도의 부설권을 갖고 있었기에 러시아가 경찰권을 행사하던 지역이었다. 

 

-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했던 권총의 행방은 아직도 알 수 없다.(일본 측에서 폐기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별다른 기록이 없다.)

 

- 한국 천주교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교리에 어긋나는 살인으로 보고 의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그런 평가는 이어졌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처음으로 공식 추모미사를 집전하면서 가톨릭계에서의 복권이 이루어진다. 

“의거는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행위였으므로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김수환 추기경)”

 

-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다. 

 

 

○ 감상

-. 문체가 건조하지만 힘이 있어 문장이 주저하지 않는다. 흑백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고요하지만 선명하다. 이 소설이 영화였다면 배경음악이 없는, 그런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 안중근이 독백을 하는 순간에는 아주 깊게 이입된다. 특히 이토를 떠올리는 부분에서 그렇다. "이것이 이토의 이목구비로구나. 보통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구나"(p.99). 나라도 그렇게 이토를 떠올렸을 것 같다. 

 

-. 안현생이 수녀원에 맡겨지는 부분은 아주 건조하게 서술되어있을 뿐인데 눈물 없이 보기 힘들다. 

 

 

○ 책 속에서

- 메이지는 군복을 입으라는 신하들의 마음을 그렇게 헤아렸다. 두려움은 못 느끼듯이 느끼게 해야 만 흠뻑 젖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 정보참모는 여러 지역의 소요사태를 열거하고 문서의 말미에 상황개요라는 항목으로 "일파가 흔들리니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라고 써놓았다. 

 

- 위스키의 찌리는 맛을 이토는 좋아했다. 번민이 클수록, 위스키 맛은 날카로웠다. 

 

- 미개한 군중을 제압하려면 경찰보다는 군대를 써야 하고 일시에 맷돌처럼 갈아버리는 방법이 좋다고 하세가와는 늘 이토에게 말했다.

 

- 빌렘은 안중근의 성정을 위태롭게 여겼다. 안중근은 소년 시기를 거치지 않고 유년에 청년으로 바로 건너온 사람처럼 보였다. 

 

- 신문은 소요군중을 '의병'이라는 두 글자로 일컫었는데, 글자 두 개가 더 큰 무리를 불러 모았다. 신문의 문장은 곧고 단단해서 읽는 사람을 찌르고 들어왔다.

 

- 메이지 황궁은 늘 고요해서 겨울에는 눈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 안중근은 그 이후를 기억할 수 없었다. 쏠 때 확실했던 일들이 쏘고 나니 몽롱했다. 

 

- 미조부치는 분도에게 안중근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분도가 안중그느이 사진을 보면서 

"이것은 나의 아버지다."

라고 말했다고 미조부치는 청취서에 기록했다.

 

- 아마도 빌렘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한탄'했을 수도 있겠다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교회가 영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이토가 만든 세상의 땅 위에 세워진 것이고, 빌렘도 그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그 땅 위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고 빌렘도 빌렘 자신의 모순에 부딪혀 있을 것이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 마나베는 자신의 질문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 그럴 테지. 신부님은 프랑스 사람이다. 프랑스는 힘센 나라다. 신앙에는 국경이 없다고 신부님은 말했지만 사람의 땅 위에는 국경이 있다.

 

- (작가의 말)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 김훈 <하얼빈> 줄거리와 역사적 흐름

 

1. 이로 히로부미와 순종의 순행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을 앞세워 조선을 여러 곳을 순행하는데 이는 황제의 권위를 앞세워 조선 지배에 대한 민중의 합의를 형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이토가 황제를 납치해 일본으로 끌고가려 한다고 생각해 더욱 일본을 경계했다. (1909년 1월)

 

2. 이토의 의병 토벌

이토는 민중의 반발이 심해지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투입해 '맷돌로 갈아버리듯' 조선을 초토화시켰다. 역사에서는 이를 '남한 대토벌 작전' 이라 한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의병 약 1만 8천명이 희생된다.)

 

3. 이토 히로부미 다롄 도착(1909년 10월 18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는 의기 양양하게 만주를 시찰한다. 다롄(대련) - 봉천(선양) - 창춘(장춘)까지 가는 곳 마다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이토는 남만주 철도를 시찰하고 하얼빈에서는 러시아 재무상을 만날 계획이었다. 

 

* 러일전쟁 최대 격전지 뤼순(여순)에서 일본은 4번에 걸친 대공습 끝에 203고지를 점령하고 전쟁의 승기를 잡는다. 이토 역시 10월 20일 이곳을 찾았다.

 

*동청철도와 남만주 철도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만주지역 철도 부설권을 얻어 설치했다. 청나라 동쪽이라 하여 동청東淸철도라 불렀으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중국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중동中東철도라고 불렀다. 

 

하얼빈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다롄에 이르는 노선과 하얼빈에서 동쪽으로 이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노선 전체가 러시아의 관할이었으나, 러일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다롄부터 장춘까지의 구간을 일본에 빼앗긴다. 이 구간을 '남만주 철도'라고하며, 이토가 다롄부터 하얼빈으로 향하는 길이 바로 남만주 철도 노선이었다. 이토는 승전의 기분을 만끽하며 하얼빈으로 향한다. 

 

4. 안중근, 우덕순 블라디보스토크 출발(1909년 10월 21일)

둘은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거사에 대한 거창한 대의도, 거사 이후의 도주방법도 의논하지 않는다. 다만 거사를 앞두고 깨끗한 의복을 사입고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3등석에 올라타 하얼빈으로 향한다.

(김훈 작가는 이 대목을 '청춘의 아름다움을 번개처럼 알 수 있는 장면'이라고 말헀다.)

 

5.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사이로 이토를 겨냥하고 3발을 발사한다. 순간 총에 맞은 사람이 이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토 옆에 있던 이들에게도 총을 쏜다. 작가 김훈은 이 대목을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라 말했다. 안중근이 쏜 것은 이토가 맞았다. 이토는 절명했고 이토와 함께 저격을 당한 사람들은 생존한다. 

 

저격 이후 체포된 안중근은 이토가 온 길을 거슬러 뤼순까지 갔다. 일본은 안중근을 무지몽매하여 이토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해 살해한 것으로 몰아가려 했다.

 

* 순종은 이토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문은 덕을 널리 펼쳤다는 뜻이고 충은 충성된 신하라는 의미였다. 

 

6. 신문

안중근 신문받는 동안 자신의 유불리를 따져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총을 쏘기 위하여 총을 쏜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하여 총을 쏜 것이다.

안중근은 법정을 열어 전 세계의 언론과 기자들의 주목 앞에 이토와 일본의 죄악을 성토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고자 했다.

 

7. 재판(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일본은 재판을 통해 자신들이 문명국임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재판에서 동양평화에 대한 철학과 신념을 설파한다.

* 동양 각국이 독립국으로 남아야 발전이 가능하고, 식민지가 되면 발전할 수 없다. 진정한 동양 평화는 동양 각국이 독립으로 남아있을 때 가능하다.

 

8. 사형 선고(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항소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세례를 해준 니콜라 빌렘 신부를 만나고자 청했다. 빌렘이 응하여 뤼순 감독에서 면회와 고해성사가 이루어졌다. 

 

9. 순국(1910년 3월 26일)

 

10. 한일병합(1910년 8월 29일)

 

 

○ 작가 인터뷰

 

- <하얼빈>은 2022년 여름에 출간된 책이다. 하얼빈 거사 직전부터 이후 사형 당하기까지 약 5개월 간의 시간을 담았다.

* 작가는 '하얼빈'이라는 제목이 무정하고 불친절한 제목이지만 그 대신 완결성을 갖는 제목이라고 평했다. 

* 작가가 생각한 본래 원제는 <하얼빈에서 만나자>였으나 출판에서 <하얼빈>으로 고쳤다고 한다.

*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다 철도가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발전해 도시가 되었다.   

 

- 안중근을 너무 이야기 속의 영웅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삶 근처의 한 젊은이로 조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안중근은 실제 삶에서 이토가 조선을 침탈하는 과정을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안중근이 거사를 결심하는 모습을 쓰지 않았다. 그것을 쓰면 단순한 영웅서사가 된다. 그런 것 없이도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그 시대적 배경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 대학 다닐 때 안중근 신문조서를 읽고 꼭 안중근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젊은이들의 소망이 대게 그런 것이다. 아주 강렬한 소망이 있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50년 내내 매달려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충격이 책으로 나오기까지 내 마음을 떠난 적은 없다. 

 

- 1974년에 신문사에 입사했다. 비슷한 시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과 함께 내 청춘이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은 매우 억압적이었다. 운신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일은 고단했다. 그 시절에 안중근의 조서를 보니 "정말 빛나는 청춘이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때의 감동은 정말 놀라웠다. 

 

- <칼의 노래>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이 인간의 생애를 바꿀 수 있는 경우가 김훈 작가에게는 2개나 있었던 것이다.

* <칼의 노래> 역시 50대에 쓴 책으로, 구상 이후 실천까지 30년이 걸렸다.

 

-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여기서 '꽃은'이라고 한다면 주관적인 내면이 세계가 되는 것이고 '꽃이'라고 한다면 객관적인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차이, 다른 차원이 이야기가 벌어진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예로 들면서 자주 언급했던 부분이다.

 

- 안중근의 의거는 영웅적 행동이나 그의 내면,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자 했다. 

 

- 당시 이토의 명분이었던 문명개화는 약육강식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토는 그러한 양면성을 모두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국 일본을 봉건에서 근대로 바꾼 엘리트 중에서도 최선봉이었으면 다른 한 면으로는 약육강식을 가장 선봉에 섰던 사람이다. 문명개화와 약육강식이 합쳐지면 제국주의가 완성된다. 안중근의 거사는 그러한 약육강식에 저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는 중국, 한국, 대만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토에게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었을 지 모르나, 그것이 생애 크게 돌출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말한 문명개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에 대한 깊은 고뇌없이 그저 일본의 국가 이데올로기에만 매몰 사람이다. 자기 모순과 딜레마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그 도덕적 성찰의 실패가 훗날 큰 비극(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원폭투하)을 낳았다. 반면 안중국의 동양평화는 동양의 나라들이 각자 독립된 상태로 존재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의 운명은 하얼빈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 인류사의 모든 혁명은 약육강식을 견딜 수 없어 발생한 것이다. 

* 이제는 약육강식이 너무 일상화, 당연시되어 이제는 약육강식인지도 모른 체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이곤 한다. 

* 따라서 안중근의 사명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 중첩되는 갈등들. 가족으로써, 가톨릭교도로써, 한 명의 청년으로써.

* 안중국은 가톨릭교도였지만 이토를 죽이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하얼빈은 철도의 교차점이자 거대 세력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 안중근, 이토, 김아려와 가족들이 세 갈래에서 와서 하얼빈에서 모인다. 

 

- 안중근의 청춘이 빛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 그 세계의 악을 향해서 자기 몸 하나를 갖고 달려드는 데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벽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그 순간은 그의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 "총을 쥔 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총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 포수이자 무직. 안중근의 생업은 없었다. 혁명가의 삶을 살았지만 유랑을하며 살았다. 우덕순 또한 스스로 담배팔이라고 소개했다. 이 단어들은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고, 그 어떠한 외력에도 기대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직이나 담배팔이도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고 혁명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작가는 포수, 무직, 담배팔이의 세 단어가 소설을 집필하는 내내 등대처럼 반짝였다고 말했다. 

 

- 거사 자체는 소설에서 단 3페이지의 분량이다. 이 사건이 갖는 물리적 구조에서는 그 사건이 클라이맥스겠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클라이맥스는 저격 이후 재판에서 동양평화를 이야기하고 거사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대목, 그리고 천주교 사제들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대목이었기에 거기에 더 역점을 두었다. 

 

- 안중근 최대의 갈등은 저격 이후 이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 "내가 아내에게 못할 일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안중근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했을 것이다. 일본 검찰이 가족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물을 때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말했으나 차마 그 마음을 형언하기도 힘들 것이다. 

* 안중근은 16세에 결혼했고, 당시 부인 김아려는 17세였다. 

 

-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가족을 불렀을 때, 당시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하얼빈에서도 가족들이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만 조선에 가족들을 남겨둘 수 없으니 다만 부른 것이다. 이것은 가장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물론 가족들은 하얼빈에서 살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후에 상하이로 간다. 

 

- "너는 어디를 겨누었느냐"라는 검찰관의 질문에 "가슴을 겨누었다"라고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내질렀다. 이후에도 일관되게 담담한 태도로 진술한다. 재판에서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청춘의 빛나는 모습이다. 완벽하고 간단한 표현으로 핵심부를 향하는 말을 한다. 총알을 심장에 꽂아 넣듯이, 그렇게 말을 한다. 

* 우덕순 역시 일본 검찰은 그를 안중근의 하수인으로 조작하려 했으나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참여했다고 말한다. 

 

- 안중근의 총알 7발 가운데 한 발이 남았지만 이것은 적들에게 미처 다 쏘지 못하고 잡혀 남게 된 것이다. 혹자는 안중근이 자결하려고 남겨둔 것이라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재판에서 이토의 죄목을 낱낱히 밝히리라는 생각으로 거사에 임했다. 

 

- 안중근의 희망은 동양의 평화에 있었고 그것은 총알이 아니라 말 속에 있었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그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물론 당대에는 안중근의 희망이 경청되지 못했다. 하지만 후세에 두고두고 경청되고 있는 것이다. 

* 사형 직전 안중근의 모습(아래 사진)은 편안해 보인다.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토의 죄를 모두 밝힘), 그리고 사제와도 고해성사를 통해 화해를 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 대련을 취재하고 싶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또 공교롭게 중국에서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하여 취재를 하지 못했다.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훗날 하얼빈을 방문하고 다시 이야기를 보충해보고 싶다. 

*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의 경우 처절한 역사적 사건과 별개로 풍경, 풍광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여 서사와 묘사가 주는 대조(콘트라스트)가 강한 것이 김훈 작품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얼빈을 가보지 못한 상태로 이 소설을 집필했기에 그러한 묘사가 다른 작품에 비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아려 여사의 이야기가 소설 한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점 또한 아쉬운 점이다. 

 

- 우덕순은 애초에 독립운동이 아닌 경제적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러나 그 역시 자연스레 안중근의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함께 이토를 죽이자고 말을 던지고 바로 다음날 하얼빈으로 떠난다. 청년의 열정이다. 

 

- 안중근을 그의 시대에 가두어 놓을 수 없다. 안중근이 말한 동양평화는 지금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점이다. 

북한은 핵강국이 되었고, 우리는 경제 강국이 되었다. 부딪히면 양쪽이 다 죽는다. 거기다 강대국들과 블록을 만들어 대치하고 있다. 지금 시대는 악의 클라이맥스다. 안중근은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청년들이 공동체와 그 시대 전체를 생각하는 시야가 있어야겠다. 그런 것이 한 인간의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 기타

순종의 서북순행(개경 만월대), 일산(日傘) 아래, 망토 두른 이가 순종, 그 바로 옆(사진 기준 좌측)이 이토 히로부미

 

1. 순종의 서북순행

김훈 작가는 순종을 망국의 폐허 앞에 세워두고 촬영한 이 사진을 일본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활동으로 분석했다. 

 

<참고한 영상>

*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 2022년 8월 8일 YTN 인터뷰(박석원 앵커)

* 국가보훈부 보훈서가 1편

* 교보문고 인터뷰(2022.9.5.)

* SBS뉴스 이슈탐사(2022.10.30)

* 김현정의 뉴스쇼(2022.8.16)

* 다큐인사이드 하얼빈에서 만나자(2023.2.24)

* 알릴레오 북's 78회(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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