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방송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뿌리, 키이우 루스 공국
- 키이우 루스 공국(882 ~ 1240): 바이킹 세력을 비롯한 루스인들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일대에 세운 국가, 13세기 몽골제국의 침략(칭기스칸)에 의해 1240년 멸망한다.
키이우 루스 공국은 멸망 후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는데 남쪽의 키이우 공국은 우크라이나의 시초 국가이고, 북쪽의 블라디미르 수즈달은 러시아의 시초 국가로 여겨진다. 블라디미르 수즈달은 모스크바 대공국 시기를 거쳐 러시아로 이어진다. 반면 같은 시기 우크라이나는 중부 유럽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스탈린 시대의 우크라이나
훗날 소련은 산업화 자금 확보를 위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수탈한다. 표면적으로는 농산물 수출 강요였지만 그 내면은 식량수탈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유서 깊은 농업 강국으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강했다. 자영농들은 1920년대 우크라이나 곡물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부농계급, 러시아어로는 '쿨라크')
그런데 스탈린은 농토의 국유화를 주장하면서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몰고 토지를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 즉 '기아에 의한 죽음'이 벌어진다. (1932-1933) 우크라이나 인구의 10%인 약 350만 명이 사망한다. 심한 지역은 분당 17명, 하루 약 2만 5천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33개 지역에서는 식인 사례까지 보고되었다. 스탈린은 단순한 식량수탈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소련은 체르노잼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주요 지역에 러시아인을 이주시켜 땅을 강탈한다. 우크라이나내의 뿌리 깊은 친서방 vs 친러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체르노젬: 우크라이나 전역에 걸쳐 있는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흑토지역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우크라이나 인구의 90%가 독립에 찬성했다. 러시아계가 다수인 동부지역(하르키우, 루간스크, 도네츠크, 자포로제)에서도 80%이상이 독립에 찬성했다.
유로마이단 시위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친서방파와 친러파가 정권을 여러 번 주고받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친러 세력이 약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친러 대통령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EU 협력 협정 체결을 거부했다. 오히려 러시아와의 강한 협력을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여 친유럽정책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유로마이단 시위가 2013년 대대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우크라이나 역사사 최대 규모의 친유럽 시위였다.
아누코비치 정부는 시위단속법을 제정하여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결국 탄핵 당하여 야반도주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2014년 조기대선을 통해 친서방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군사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를 장악한다. 크림반도를 점령한 것이다. 크림반도는 주민의 약 60% 이상이 러시아계였다. UN은 러시아의 행위를 불법행위로 간주하였으나 미미한 제재만 시도하는데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시기 IS가 이라크를 점거하면서 이라크 내전(2014~2017)이 시작되었다. 중동의 정세가 너무도 심각했기에 우크라이나 문제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국제사회의 미미한 반발을 확인한 푸틴은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022년 6월 5일 방송분
중동과 미국의 움직임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지만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데는 실패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바마가 취임하던 2009년까지 방치상태였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2003 ~ 2011)에 집중하는 사이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결국 오바마는 200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병력 증파를 선언한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 역시 오래지 않아 전쟁의 피로함을 겪게 된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가 아프가니스탄은 더욱 방치되기 시작했다. 2020년 2월 29일, 트럼프는 급기야 탈레반과의 평화 협정까지 체결한다. 이후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다. 아프가니스탄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바이든은 2021년 4월 철군을 선언한다. 같은 해 9월 11일까지 미군 병력을 모두 철수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그해 8월 15일, 미국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미군 철군과 동시에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한다.
마약과 탈레반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마약 생산량에서 80~90%를 차지한다. 2015년에서 2016년 통계를 보면 마약 관련 종사자가 정부군과 경찰보다 그 수가 많다고 보고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양귀비 재배는 곧 국민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파키스탄과 이란 국경지역에 마약 제조소들이 밀집해 있고 탈레반은 이들을 보호했다 양귀비 재배 규모가 커질수록 탈레반이 성장하는 구조였다.
아프가니스탄 재건 사업 당시 영국은 마약 분야를, 미국은 군사 훈련 분야를 담당했다. 초기 미국은 영국에게만 마약 단속을 일임했고 무관심했다. 영국은 양귀비밭을 파괴한 만큼 돈으로 보상해주었는데 이것이 실책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양귀비를 심으면 심는 만큼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귀비를 심고 태우는 것을 반복할 수록 땅은 더욱 더 비옥해졌다. 태우기 전 양귀비 유액을 체취하여 팔았고, 밭을 태운 뒤 보상금을 챙겼다. 결국 영국은 인센티브 제도를 폐지한다. 그러자 농민들의 반발은 높아졌고 자연스레 탈레반의 지지도가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탈레반은 양귀비 값을 지불하고 구매했다.
미군 철수 이후,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은 공식 정부로 인정받기 위하여 양귀지 재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탈레반 정권의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 -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재건
* 기간: 20년 (2001년 ~ 2021년)
* 미군 희생자: 2,416명
* 전쟁비용: 1조 달러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후 2014년 초까지 약 1천억 달러(약 130조 원)에 달하는 재건 비용이 투입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16개국에 소요되었던 재건 비용보다 많은 액수다. 거기다 군과 경찰 병력 재건 등 모든 원조금을 합하면 1조 달러(1300조 원)에 달한다는 통계도 보고된 바 있다.
이라크 전쟁과 미국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 유럽 각국에서는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가 잇달았다. 당시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 중이며 훗날 이것이 테러 조직에 제공되어 미국에 핵무기 테러를 저지를 것이라 예상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은 쉽게 종식될 것이며 이라크 국민들은 미국을 후세인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준 해방자로 여길 것이라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다.
콜린 파월은 2003년 UN에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근거는 거짓이었다. 콜린 파월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꼼꼼히 확인했음에도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근거 없는 첩보와 원하는 정보만 갖고 있었던 미국이었다. 결국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를 침공한다. 개전 20일 만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된다.
*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차이점: 아프가니스탄은 국가의 기본 체제 자체가 유명무실했으나 이라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행정 체계가 존재하는 국가였다.
이라크 인구의 50%를 자치하는 시아파는 전쟁 초기 집권 세력이던 수니파(인구의 25%)의 몰락을 보며 기뻐했다. 이후 시아파는 수니파의 부할을 우려하여 강하게 수니파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내부적으로 종파 갈등이 극에 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담 후세인 시절에는 후세인의 철권통치로 인하여 알카에다(수니파 극단주의 세력) 등 극단주의 세력이 이라크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인이 사라지자 힘의 공백을 노린 알카에다는 시아파를 공격하며 이라크 내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먼저 알아스카리 사원을 폭파시킨다. (2006년 2월) 이 사건을 게기로 본격적인 종파 갈등이 시작되고 사원 폭파 이후 4일간 바그다드에서만 1,300명이 살해 당한다. 2006년 한 해 동안 이라크 내 희생자는 2만 8천 명까지 치솟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를 종파 갈등이 아닌 사담 후세인 잔존 세력의 저항이라 오판한다.
2007년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안정화 전략'을 발표한다. 미군을 증파해 직접 이라크 국민들에게 안전을 제공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미군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거주지를 물리적으로 분리했다. 이를 위해 50개 이상의 미군 기지를 구축했다.
현지 사령관이었던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는 이라크 내전이 종파간 갈등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하고 수적으로 약자인 수니파를 보호해서 알카에다와의 연계를 끊도록 유도했다. 이후 이라크 내 무력 충돌을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후 미국은 2011년부터 순차적으로 전투 병력을 이라크로부터 철수시킨다.
* 2010년 이후 세력이 약화된 알카에다는 이라크를 떠나 모두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미군이 수니파를 보호하는 것으로 여긴 시아파는 오래지 않아 미군이 수니파와 연합하여 자신들을 탄압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쓸리게 되고 미군 철수 후 권력을 잡은 시아파는 수니파를 다시 억압하기 시작한다. 결국 수니파는 다시 이라크 외부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결탁하게 된다. 바로 IS다.
IS는 학교, 경찰서, 법원, 화폐, 은행 등 실제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시리아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 2014년 1월, 약 1천 명의 병력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들은 이라크 정규군 50만 명을 패퇴시켰다. 이라크 정규군은 원조금을 타내기 위해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던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2014년 다시 군사 개입을 선포한다.
단,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 못박았다. 미군은 폭격기를 투입하야 공중 폭격을 지원했고 지상전은 이라크군을 훈련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라크 육군 양성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 미군이 개입을 선언한지 2~3년이 지나자 이라크군이 IS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2015년 4월 17일 티크리트 수복을 시작으로 2016년 6월 팔루자, 2017년10월 모술을 차례로 탈환하고 2019년에는 IS가 점령했던 거의 모든 지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2019년 트럼프 행정부는 IS 수장 알바그다디를 사살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수행한다.)
테러와의 전쟁 종식, 그리고 미중 양극체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핵심은 결국 마약과의 전쟁이었고, 이라크 전쟁의 핵심은 결국 종교전쟁이었다. 그리고 무너트린 정권을 대신해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주민들과의 신뢰 형성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최첨단 무기만 믿은 채 이 이 모든 것들을 등한시 했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이후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미국은 미군에게 국가 건설이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민족과 종교가 다양한 중동지역에서 군대가 이 모든 것을 직접 담당하는 것인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전문 영역의 전담자, 가령 아프가니스탄의 마약전문가, 이슬람 국가의 종교지도자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러한 도움을 받고자 하지 않았다. 오만에서 오는 무지, 그리고 무지에서 오는 오만함이 비극을 불러왔다.
미국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도 무시했다. 중국이 굴기하는 동안 미국은 중동에서 전쟁의 늪에 빠져있었다. 그 결과 1991년 이래로 이어지던 유일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미-중 양극체제를 불러오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대신 무기와 자금만 지원하는 것은 어찌보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얻은 교훈일지 모른다. (2014년 IS와의 전쟁 때부터 미군 병력 투입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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