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년 1월 16일 방송분(신병주 교수)
- 의궤란 의식에 대한 궤범이란 뜻으로 궤범軌範은 정해진 메뉴얼을 뜻한다. 즉, 왕실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다.
행사가 끝난 후 궤범으로 기록을 남겨 놓으면 이후에 비슷한 행사가 있을 때 바로 적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제19대 왕 숙종의 혼례식 기록은 이후 제21대 왕 용조의 혼례식 준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 세종 4년 실록 기록에 따르면 태종의 국젱 제도를 논의하며 태조와 정종의 '상장의궤',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국상의궤'를 거론한 적이 있다. 현존하지는 않으나 조선 초기부터 의궤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의 의궤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능 조성에 대해 기록한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1600)이다.
- 현재 총 3,931책의 의궤가 전해진다. 규장각에서 약 2,900책을 보관하고 있고 그 외에는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고궁박물관 등에서 보관하고 있다.
- 의궤는 임금이 직접 보는 어람용 의궤와 각 지방의 사고와 의정부, 춘추관, 예조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分上)용 의궤가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의궤는 어람용 의궤였다.
"이 책들이 뛰어난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종이와 수많은 책을 경첩과 걸쇠와 구리로 된 쇠붙이로 장식한 제본 기술을 보고 감탄했다. 이책들은 비단 천으로 싸여 있고 무두 붉은색과 금빛으로 칠한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잘 정리된 왕실 도서였다." (당시 프랑스군의 기록)
-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의궤를 찾기 위한 프랑스 박물관 사서로 일한 박병선 박사(1929~2011)의 공로였다.
- 프랑스는 어람용 의궤를 약탈한 후 보관과정에서 표지를 개장改裝하여 본래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에서 프랑스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훼손이 있었고 그 때문에 새로 표지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 <대사례의궤>는 임금과 신하가 활쏘기를 하는 대사례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영조는 약 200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던 대사례를 부활시켰다. 당시 기록을 보면 참여자 30명 중 약 40%인 12명이 왼손잡이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왼손잡이에 대한 차별이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의궤 속에 왕의 모습은 그리지 않는다.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에 임금의 모습은 어진이 아니면 별도로 남기지 않는다.
- 1794년 정조의 수원 화성 건설과 <화성성역의궤> (1796)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양주 배봉산 아래 조성되었다. (1762년) 정조가 즉위 13년 뒤 이를 화성으로 이전했다. 정조는 묘를 이전하며 수원 화성을 건설했는데 공사 기간 2.5년에 연인원 70여만 명이 투입된 대공사였다. 공사비만 80만 냥에 달했다. 당시 한 냥으로 쌀 20kg을 구매할 수 있었으니 지금의 4~5만원으로 볼 수 있다. 한 푼은 한 냥의 1/100이다. 약 500원이다. 사극에서 구걸을 할 때도 한 냥이 아니라 한 푼만 달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공사가 완료 되었다. 정조는 화성 건축과정을 일종의 국정 홍보를 위해 알리고자 했다. 의궤를 여러 부로 제작하였다.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이 많은 10권 9책으로 구성되어있다. 의궤에는 공사 참여자의 이름은 물론 근무일을 0.5일 단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지급된 품삯 역시 자세하게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1970년대 복원 과정을 거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복원된 유산이라는 점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의궤를 바탕으로 원형 그대로 복원했음을 주장했고 유네스코에서 이것을 받아들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 정조는 화성을 건설한 이후 자주 행차했는데 이로 인하여 시흥을 통해 수원에 이르는 길이 생겼다. 본래는 창덕궁-노량행궁-과천행궁(온온사)-사근참행궁(지금의 의왕시청 별관)을 거치는 관악산 동쪽 길을 자주 이용했으나, 정조 이후 시흥행궁을 거치는 서쪽 길이 자주 이용되었다. 신작로라는 말 역시 이때부터 자주 사용되었다.
한강을 건널 때는 경강상인들이 보유한 배를 이용해 아치형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이 배다리 역시 정약용이 설계한 것인데 정양욕이 스스로 지은 묘지명(자찬묘지명)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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