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2월 6일 방송.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안정준 교수(젊은역사학자모임 대표)
- 조공 - 책봉 제도의 기원
중국의 황제는 각 지역의 제후에게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조근朝覲이라 하여 황제를 찾아 인사를 올렸다. 이때 제후들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함께 바쳤는데 이를 공물이라 한다. 조근과 공물을 합쳐 조공이라 불렀다.
주변국들이 황제국과 교섭을 하기를 원하자 중국 왕조는 교섭을 원할 경우 조공 - 책봉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고 주변국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조공 책봉 관계가 국가간에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모든 국가들이 형식상 평등한 상태이나 고대는 신분제 사회였기에 국가간에도 상하관계가 존재했다. 따라서 조공-책봉 제도는 속국 개념이 아닌 당대의 보편적 외교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황제는 조공을 받으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회사품을 내렸다. 주로 조공의 다섯 배에서 열 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삼국시대 삼국은 주로 인삼, 모피, 머리카락(약재로 쓰임), 천리인, 말 등을 가져갔다. 회사품으로는 서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는 비단, 도자기, 학자와 기술자를 파견받는 일도 있었다.
- 중국 왕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있을 때에는 국력에 따라 조공국도 차이를 보였다. 남조와 북조 중에서는 북조가 더 강성했는데 조공국 역시 북조가 많았다.
- 양직공도는 양나라에 조공은 국가들의 사신을 묘사한 그림인데 양나라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파사국(이란), 왜국 등은 실제로 조공을 오지 않았으나 허구로 추가한 나라로 여겨지며, 특히 파사국은 150년 전 기록에 남아있던 정보를 그대로 다시 기술하였다. 아마 당시 동양의 끝인 왜국과 파사국을 추가함으로써 세상의 끝과 끝까지 널리 알려진 양나라의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 양직공도에는 521년 백제 사신의 발언을 적은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소국이 백제에 복속되어 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신라가 '사라'라는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신라 사신이 백제 사신과 함께 동승하였음에도 외교적 수완과 외국어 능력에서 앞서있던 백제 사신이 자국의 유리함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를 의도적으로 백제이 속국처럼 묘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백제는 무령왕이 즉위(501년)하면서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6세기 초반이었다. 백제 사신이 양나라를 찾기 몇 해전 고구려 사신이 양나라를 찾았는데 이 방문 때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패퇴한 사실이 양나라에 알려져 외교적으로 반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백제 사신의 활약으로 고구려가 책봉받았던 영동장군 보다 더 높은 영동대장군의 책봉호를 받는데 성공한다.
외교참사를 겪은 신라는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중국과 직접 외교에 성공한다.
- 백제 요서 진출설 역시 중국 역사서에만 남아있는 기록이다. 백제가 북위를 공격하여 요서를 정복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상대국인 북위의 역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오로지 남조였던 송나라의 역사서에만 전해진다. 아마 요동의 차지한 고구려보다 요서를 차지한 백제가 남조의 입장에서는 더욱 필요한 존재처럼 여겨질 것이고 이것을 고려한 백제의 외교활동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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