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들/독서

허송세월(김훈)

Varsika 2024. 8. 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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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지난 연말 작가와의 북토크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글로 태어나 반가웠다. 나 역시 말로 뱉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실처럼 엮어 다른 이에게 글로 내 보이고 싶다. 

 

김훈 선생님 건강하세요.

 

 

○ 책 속에서

 

-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루뭉실하다. 이 취기는 마음 속에 몽롱한 미로를 끝없이 펼쳐 놓는데, 그 미로를 따라가면서 마시다 보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노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 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소주는 생활의 배설구였고 종말처리장이었는데, 나 역시 거기에 정서를 의탁해서 힘든 날들을 견디어 왔다.

 

-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눈물만 흘리는 억울한 울음을 읍이라고 하고, 소리를내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이라고 하고, 눈물도 흘리곻 소리도 나는그 중간쯤을 체라고한다는데, 이날 나의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몸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 내는 울림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자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따. 모음은 슬픔의 서사구조를 용해해서 울림으로 울리게 하는데, 이 울림은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는 정화기능을 갖는다. 

 

- 신록의 생명은 확실하고 자명해서 인간의 생명감과 직통하므로, 나무 한 그루에 새 잎이 돋ㅇ면 천하의 봄을 알 수 있다.

 

- 승객 443명과 승무원 33명, 약 2,214톤의 화물을 실은 이 화객선은 6.25 때 어린 자식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선 애 엄마만도 못한 안전장치를 하고 바다로 나갔다. 

 

- 이 참사는 대형 '교통사고'이며 그 희생자들은 재수 없이 그 사고에 얽혀든 불운한 소수의 사람들(the unlucky few)이므로 적절한 보상과 조문과 위령의 의전을 베풀어 줌으로써, 이 우연한 사태가 산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하고, 소비경제에 미치는 심리적 악영향을 막아 경기를 활성화하자는 것이 세월호 '극복' 움직임의 핵심적 논리였다.

 

▷ 최은영의 소설 중, 미군에 희생당한 여성을 '민족의 누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정작 대학가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에 대해서는 사소하고 우연한 재수없는 일로 치부하고 말았던 운동권의 말이 생각났다. 

 

-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는 이 거대한 비극의 의미를 내면화하지 않았고, 그 비극의 심층구조를 맞대면하지 않았고, 미래를 향한 반성과 실천의 발판을 확보할 수 없었다. 세월호 이후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일상적 노동과 생산과 생활의 현장 속에서 수 많은 이준석, 김경일, 유병언과 만나게 된다.

 

- 일제의 '순난자 위령비'. '순난'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서 나는 국가나 민족이 자신의 역사 앞에서 정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했다. 이 위장과 미화는 식민지 철도 개통실에서 제창했던 '황국신민의 서사'나 '기미가요'와 맥이 통하고 있었다. 

 

- 죽음이 망각에 묻혀 일상화되면 사람들은 절망을 절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무엇ㅇ르 해야 하는지 몰랐고 지금도 알지 못하며, 안전시설을 갖출 자금이 업속, 사업주가 처벌받으면 공장을 돌릴 수가 없게 되어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밥 먹기가 어렵게 된다고, 경영자 세력은 국회와 정부를 찾아다니며 로비했다. 이들의 말은 언론을 통해서 쾅쾅 울렸다. 이 말들은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는 맞다. 나는 그 범위 밖을 말하려 한다. 

 

- 살려고 먹는 밥숟가락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 날마다 거듭되는 죽음이 빤히 보이는데 동료 인간의 목숨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돌려서 나의 밥을 먹고, 내가 재수 없으면 나의 목숨을 동료 인간의 밥의 토대로 바쳐야 한다먄 이런 밥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다. 

 

- 꽃은 아름답지 않고 똥은 더럽지 않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형용사와 부사는 그 단어가 수식하려는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정서나 감각과 선입관을 표현한다.

 

-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 자동차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자유와 조화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4천 원이나 5천 원짜리 밥을 먹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 소주는 면도날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고, 몸속의 오지에까지 비애의 고압전류가 흐른다. 

 

- 글을 쓰는 사람들이 사람 사는 일을 정면으로 들이받지 못하고 옆으로 피해서 모호하게 얼버무릴 때 '삶'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끌어와 쓰는 꼴을 흔히 보게 되는데, '고향' 식당의 '대중식사' 네 글자는 비켜갈 수 없는 삶의 현실을 내 눈앞으로 밀어붙였다. 

 

- 난해한 현실을 꿰뚫어 보고 해석하는 통찰력과 거기에 언어를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금수저, 흙수저 같은 단어들이 태어난다. 이 단어는 조어이지만, 꿰맨 자리가 없어서 자연발생한 단어들처럼 보인다. 

 

- 사다함은 <금강경>에 나오는 각자覺者의 등급인데, 욕계의 유혹을 끊은 성자라는 뜻이다.

 

- 황사영은 초야의 포의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현실의 야만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야만성의 현실적 뿌리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는 순결했으므로, 순결한 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순결한 만큼 세상물정을 몰랐다. 그는 세상 물정에 아둔한 만큼 담대했고, 담대한 만큼 무모했다. 그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아마도 그때 내가 동료 신앙인으로서 황사영의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그의 행동을 말렸을 것이다. 

 

-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종교의 취지에 반한다고 생각치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안중근은 침묵한다) 안중근의 침묵은 신앙과 현실의 간극에 끼인 그의 깊은 고뇌를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침묵이 가장 현명하고 거룩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이 위태로운 신문에 침묵함으로써 현세의 교회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를 열어 놓았다. 이 통로를 따라서 빌렘은 여순 감옥의 안중근에게 왔다. 

 

- 동학의 초기 지도자들은 어린이를 자유롭고 창발적인 개아個我로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어린이는 사회의 공적 구성원이며 공동체의 미래를 열어 나가는 인적 자산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아동관은 어린이를 사적 혈육과 가문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장유의 질서와 충효의 이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했던 수백 년 역사의 어둠을 걷어 내는 개벽이었다.

 

-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젊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 카인은 범행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습니다. 카인은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카인의 마음속으로 '모른다'는 것이 자신의 진실이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르고 싶다'는 것이 카인의 바람이고, 카인은 그 '바람'이 사실인 것처럼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습니다. 

 

- 삶의 현실을 배반한 언어들이 모호한 추상개념을 거느리고 신기루처럼 무리 지어 몰려다니면서 한 시대의 거대한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 (병자호란) 주전파들은 어전에서 이마로 마루를 찧으며 비통한 어조로 간언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높고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이 숭고미에 넘치는 준론峻論은 현실의 하중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자기 최면으로 유도하는 작용을 합니다. 조정의 담론은 현실과 언어를 구분하지 못했고, 관념의 공허함으로 침략의 현실을 맞아야 하는 자의 쓰라림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직의 정통성이 주전파에게 있고, 그 양보할 수 없는 대의에 목숨을 바친 조선의 선비들은 자손만대 추앙을 받아야 할 만고의 충신일 테지만, 현실의 길은 또 다른 방향으로 뻗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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