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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인남식 교수의 중동학개론 9화(이란, 사우디)

Varsika 2022. 5. 1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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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가 느끼는 이란발 위기

 

시아, 수니 인구 분포도

사우디 왕실은 바다 건너 이란이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사우디 아라비아 동쪽 이스턴 프로빈스 주에는 약 300만 명의 시아파 신도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사우디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한다. 왕실이 입장에서는 이란의 혁명 사상이 걸프 해협을 건너 이스트 프로빈스에 전파되고, 사우디 내부의 시아파를 자극해 리야드(왕실)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빠져 있다.

 

 

 

중동의 쿼드: 사우디, 터키,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

 

1979년 이전까지 중동의 4개국은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의 남하를 막아냈다. 사우디 아라비아, 이스라엘, 터키, 이란이 바로 그들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는 이들은 중동판 쿼드였다. 그 중에서도 이란은 가장 돈독한 파트너였다. 미국이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이란 팔레비 국왕에게 이란을 중동에서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란은 중동판 쿼드 4개국 중에서 인구도 가장 많은 대국이다. 특히 이란 바로 북쪽 카스피해 연안은 모두 소련의 영향권이었다. 이란이 없었다면 공산주의가 걸프 해협까지 밀고 내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만큼 이란은 필수적인 파트너였다. 

 

그러나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세력을 비롯한 이란 내부에서는 소련과 협력할 의향이 없었다. 혁명세력은 이슬람 세력이고 소련은 무신론에 근거한 공산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웠던 파트너가 반미노선을 걷자 미국에서는 이들이 소련과 결탁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빠지기 시작했다. 

 

 

 

모사데크 총리의 축출과 반미정서

 

이란 제35대 총리 모사데크

1952년, 팔레비 샤 재임기간에 모사데크가 총리(재임기간: 1952년 7월 ~ 1953년 8월)가 임명된다. 이란 국민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른 인사였다. 모사데크 총리는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당시 이란 국민들은 모사데크를 절대왕정의 이란을 입헌왕정으로 바꿀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팔레비 샤 역시 일종의 명예혁명처럼 모사데크의 행보를 인정했다. 

 

모사데크는 총리가 된 이후 이란산 석유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한다. 이전까지 이란산 석유의 대부분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구 세력이 독점해왔었다. (당시 이란산 석유를 독점했던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퍼니가 현재 브리티쉬 페트룰륨의 전신이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미국은 각자의 정보국(MI6, CIA)을 활용해 쿠테타(Operation Ajax)를 일으킨다. 모사데크 총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후 다시 팔레비 샤가 전권을 갖는 절대왕정으로 회귀한 다. 이란 국민들은 이때의 사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란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적임자를 미국과 영국이 제거한 것이며 이들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국익 앞에서는 언제든지 민주주의를 저버릴 수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전권을 갖게된 팔레비 샤는 1961년부터 백색혁명을 시작한다. 백색혁명은 차제에 이란과 미국이 긴밀히 손을 잡고, 이란을 서구식 근대국가로 재편하겠다는 프로그램이다. 이란 내의 이슬람색을 탈색시키고자 했다. 혁명의 첫 번째 골간은 토지개혁이었다. 여기에는 모스크와 모스크가 가진 재산을 국유화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당연히 시아파 성직자들은 모든 것을 빼았겼고, 훗날 혁명을 일으키는 호메이니도 크게 반발했다.

 

두 번째 골간은 금융개혁이었다. 이란의 전통적인 금융세력인 바자르 상인(바자회의 어원이된 '바자'가 여기서 나옴)들의 거래를 모두 투명하게 공개시키려 했다. 당시 바자르 상인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거래가 많았고, 자연히 암암리에 거래되던 블랙머니도 많았다. 이에 이란의 자본가들이 크게 반대했고, 이들이 성직자들과 결합하여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다. 백색혁명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세력을 너무 자극했고, 이란 국민들이 보기에는 팔레비 왕정의 호의호식과 부정축재가 더 큰 국민적 반발을 불러온 측면이 있다. 

 

 

 

호메이니 혁명과 새로운 이란

 

1979년 왕정을 몰아내고 혁명에 성공한 호메이니는 새로운 국체를 선포한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이슬람 법학자 통치체제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이슬람의 공식 국호도 이슬라믹 리퍼블릭 오브 이란,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경된다. 이란의 정치체제는 신정과 공화정이 결합한 하이브리드 체제로 변경된다. 

 

신정 부분에는 슈프림 리더(최고 지도자)와 가디언 카운슬(헌법수호 위원회)이 있다. 이들은 대통령, 국회, 내각이 실정을 할 때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총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6명은 슈프림 리더가 임명하는 종교학자들, 6명은 법학자들이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이슬람 계율을 어겼다면 이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기본적으로 이란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주권은 알라에게 있고,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알라의 주권의 대의 민주주의를 통해 표시해주는 것이다. 권력은 알라로부터 나온다. 

 

공화정 부분은 대통령과 국회를 투표를 선출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4년 연임제이며 국회의원 역시 4년마다 선출한다. 다만 가디언 카운슬에서 후보자(대선, 총선)를 선별하는 기능(마치 공천심사처럼)을 한다. 반민주적인 행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프림 리더와 각을 세우는 대통령이 선출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슈프림 리더와 가디언 카운슬이 대통령을 크게 억누르지는 않는다. 국민여론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7, 8대 대통령을 역임한 무하마드 하타미(재임기간: 1997년 ~ 2005년)는 공개적으로 친미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이란의 독특한 정치체제

 

호메이니가 고안한 이 정치체제는 마치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정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체제다. 

 

 

 

혁명 사상의 수출과 사우디의 견제

 

시아 초승달 지대에 속하는 국가들(녹색)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런 이란의 행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비성직자가 국가의 리더가 되고, 제한적이기는 하나 보편적인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국내의 시아파 세력이 이란의 이슬람 정치체제를 사우디에 적용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란 정부는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하고 싶어 한다. 이란의 혁명수비대는 정규군과 별도로 혁명의 확산을 위해 편성된 군이다. 이들은 자국내에서는 바시(Basij) 민병대를 만들어 반혁명 세력을 색출한다. (이 역시 반민주적이다). 대외작전을 펼치는 쿠드스(Quds Force, 과거 솔레이만이 지휘하던 부대)는 해외 특수작전부대로 불리며 이란의 혁명 체제를 이슬람권 전체에 확산시키겠다는 미션을 갖고 있다. 

 

바로 옆 이라크는 국민의 60%가 시아파이며, 시리아 역시 9%의 알라위파(시아파의 변종)가 정권을 잡고 있다. 이란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레바논 내의 헤즈볼라(시아파 민병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반이스라엘)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슬람 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자는 사상을 갖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시아 벨트(혹은 시아 초승달지대)에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다. 여기에 2012년 아랍의 봄 이후 2014년부터 예멘 내전이 발발했다. 예멘 정부(수니파 하디정부)에 맞서 반군(시아파인 '후티')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들 역시 시아파다. 아라비아 반도는 남북으로 완전히 이란의 혁명사상에 포위를 당한 형국이다. 이란이 아직 각 국의 정치체제까지 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돈과 무기를 지원하며 계속 빚을 지게 만들고 있다.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사우디 내부에서는 와하비즘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사우디는 정작 이슬람 세력 확장에 나서지 않고, 이단으로 취급하던 시아파 이란이 이슬람 확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관점의 연장으로 나타난 것이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반미, 반왕실) 세력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와 무자헤딘, 그리고 오사바 빈라덴

 

이런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은 1979년부터 발발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강력한 세례를 받았다. 당시 미국,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런 극단 이슬람주의 청년들을 지원하여 아프간으로 보냈다. 이들이 바로 무자헤딘이다. 이들은 소련의 붉은 군대에 맞서 이슬람 게릴라로 10년간 싸웠다. 무신론자들을 대상으로 싸운 것이다. 이들은 10년의 세월을 전투와 코란으로만 보낸 것이다. 전쟁 전보다 훨씬 강력한 이슬람 신봉자가 되었다.

 

그러나 냉전 해체 이후 그들이 고향에서 목도한 것은 호위호식하는 왕실에 평생 품위유지비로 놀고 먹는 왕자가 수 천명에 이른다는 사실이었다. 그 중 몇몇은 전세계를 유람하며 일생을 보내고, 사우디에선 거룩한 척하지만 제네바에서는 여자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린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만에 찬 무자헤딘들을 규합하여 오사마 빈라덴이 세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오사마 빈라덴은 직접 무자헤딘으로 참전한 경력은 없다)

 

사우디가 우려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란이 전면적을 일으킬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우디 내부의 반왕실 세력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이 두려운 것이다. (이란이 혁명을 수출하여 내부의 격동으로 인하여 리야드가 무너지는 것). 사우디는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며 이란과 다시 핵협상에 나서는 것을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핵합의를 폐기하고 이란을 옥죄기 시작했을 때는 한숨 돌렸지만, 이제 다시 이란과의 세력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이란의 특징

 

이란은 제국의 후예들이고, 호메이니 혁명 전만하더라도 테헤란에는 살롱이 즐비했다. 꼬냑도 즐겨 마셨다. 혁명 이전의 문화적 세례는 강력했다. 여전히 테헤란 대학교 교정에는 여학생들이 많고, 외국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내기도 한다. 사우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란은 여전히 1979년 혁명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 자유까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 여전히 이란은 생각보다 개방적이고 생동적인 사회다. 기본적으로 농산물이 풍부하고 중국, 러시아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제재를 회피하는 루트를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란은 제조업 능력도 갖추고 있다. 중동에서 유일하게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이고, 이란 항공의 비행기들은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이후 국제제재를 받기 전 구매했던 기종들이다. 여전히 운용 중이다. 과거에는 동일 기종을 해체해 부품을 조달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비슷하게 복제부품을 만들어 사용한다. 손기술이 있는 민족이다. 물론 종종 사고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오바마 정부의 이란 핵합의(2015)

 

과거 미국은 이라크 전쟁 이후 중동을 민주주의 낙원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완전히 실패했고, 이제는 중동에서 철수하고 중국을 견제해야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오바마 정부와 바이든 정부의 관점은 동일하다. 우선순위는 중국이지만 중동이 지옥이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동이 지옥이 되면 다시 극단주의 세력이 제2의 9.11을 일으킨다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알카에다와 같은 빌런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중동에 내부 역학 관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좌측부터 윌리범 번스(CIA 국장), 제이크 설리번(국가안보보좌관), 토니 블링컨(국무장관)

 

이를 위하 오바마는 2015년 이란 핵합의를 이루어냈다. 역사적인 합의였다. 합의 전인 2012년엔 이란을 완전히 옥죄었다. 한방울의 석유도 팔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이란의 경제가 바닥을 쳤고, 2013년 6월 이란 대선에서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이 된다. 그는 후보시절부터 미국과의 협력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로하니가 당선되자 미국은 특사로 윌리엄 번스, 제이크 설리번, 토니 블링컨을 급파한다. 이후 역사적인 이란 핵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대미 온건파였던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재임기간: 2013년 8월 ~ 2021년 8월)

 

오바마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중동의 안정을 위해서는 과거처럼 쿼드가 등장하여 각자의 지분을 갖는 균형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복안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이란이 악의 축이 아닌 정상국가로 돌아와야 했고, 그렇게 이란 핵합의가 탄생했다. 이란을 경계하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뒤통수를 쳤다고 느꼈다. 이후 중동의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친미의 사우디, 반미의 이란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여기에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dv_vZR1o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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