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강의 리뷰

[삼프로TV] 아랍주의, 이슬람주의 중동문화의 이해 [중세특집#2] (MBC 박정욱 PD)

Varsika 2022. 6. 15. 23:48
728x90
반응형

 

*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신과 함께 2020년 방송(본문 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

 

단일 이슬람 국가에 대한 꿈(하심,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 민족주의)

 

과거 IS는 하나의 아랍 제국을 만들겠다는 주장을 했다. 지금의 국경은 서구 열강이 그은 것이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모든 아랍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해 단일한 제국(이슬람 국가, Islamic State)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오스탄 투르크를 무너트리기 위해 중동의 하심 가문에게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을 약속했다. 당시 하심 가문은 이 약속을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무슬림 영역을 합쳐 하나의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후에 이라크와 시리아의 왕정을 하심 가문에게 맡기기는 했으나 지금은 두 국가가 모두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하심가는 현재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다. 

 

하심 가문이 통치하는 요르단의 국장 / 현재 요르단 국왕인 압둘라 2세 빈 알 후세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해 국가를 세웠다. 다른 중동 국가와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국가의 기반이 사우드 가문에 충성하는 세력이다. 지금은 3세대인 빈 살만(MBS,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세다. 본래 삼촌 항렬에서 왕위를 계승해야 하나 갑작스레 왕세자가 되었다. 스스로도 젊은 시절에는 본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간에 그가 젊은 시절 관료에게 청탁했다 거절당하자 소포로 총알을 보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Abu Rasasa(Father of the Bullet)라는 별명이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

 

왕세자가 된 후에는 정적들을 한방에 무장해제시켰다. 이후에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권력독점을 비판하던 언론인 까슈끄지를 주터키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에서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빈 살만은 혐의를 부인하고 오히려 까슈끄지의 아들을 왕궁으로 불러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다양한 정체성이 국가 내에 섞여 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이집트의 나세르가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단일 아랍 국가 건국을 제안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랍 주의 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이집트와 이라크의 왕정이 연이어 무너졌다. (이라크는 왕정 폐지 후 후세인이 집권했다.) 왕정이 몰락할 수도 있다는 공포로 인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는 아랍 민족주의가 아닌 이슬람주의를 주창한다.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민족주의는 왕당파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유럽에서 시민혁명을 통해 민족주의가 태생했다.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같은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카스트 제도의 영향이 강한 인도에서는 민족주의가 나올 수 없다.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경우에는 민족주의가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신라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은 있었으나 민족주의가 없었던 시대였다. 

 

가령 조선의 귀족들은 소중화라는 개념에 충성했다. 민족이라는 개념에 충성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이런 봉건적 문화에서는 민족주의가 나올 수 없다. 민족주의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왕)이 아닌 민족 전체, 조국에 충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립운동가는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현상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1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단일 민족으로 국가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초기단계의 민족주의 개념은 서구에 비해 빨리 생겨났다. 이를 원형 민족주의라고 한다. 근대 민족주의로 전환이 용이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가 광복 이후 고도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만의 폐쇄적인, 민족국가만의 특성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유럽이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 역시 국가별로 하나의 정체성을 갖춘 후였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모두 마찬가지였다. 서양이 만든 발명품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의 성장을 보고 19~20세기에 민족국가를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스만 튀르크 역시 터키인들 위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반면 동아시아는 비교적 쉽게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왕만 무너트리고 계급만 철폐하면 민족국가가 완성되었다. 동아시아는 이미 근대에 이르러 민족국가 완성 직전의 단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종교전쟁도 없었다. 종교로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은 각자의 정체성을 갖출 때까지 수백 년을 싸웠고, 중동은 이제 그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랍 민족주의 - 이집트와 시리아

 

아랍 민족주의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중동 국가들이 생긴 지 오래지 않았던 시점이다. 이 때문에 본인이 왜 시리아인인지, 왜 이라크인인지 알 수 없었던 이들은 아랍 민족주의라는 대의에 열광했다. 또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영-프 연합으로부터 수에즈 운하를 되찾아 아랍의 영웅이 되었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 건설회사가 건설하고, 영국이 지분을 투자한 영-프 공동 운영 체제였다. 유럽 국가들이 운하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가 버리니 나세르 대통령은 이를 강제로 점령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에 반발해 이집트에 선전포를 했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한다. (1956년) 실제로는 영-프-이 연합군에 이집트군이 무참히 패배했지만, 소련의 개입(소련은 이집트 편을 들었다)을 우려한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는 전투에 패배하고도 전쟁에서 승리했다. 운하는 이집트의 품으로 돌아갔고 아랍인들은 열광했다. 나세르는 전 아랍을 단결시켜 강한 단일 국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아랍 연합 공화국(1958-1971)의 영토(이집트 + 시리아)

 

시리아의 바트당이 이런 사태를 보고 반란을 일으킨다. 바트당은 시리아를 이집트에 바쳐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 2년 간의 통합 이후 다시 분리되었다. 하나의 국가가 아닌 시리아가 이집트의 속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바트장의 입장에서는 혁명정신이 사라져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이후 다시 시리아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시리아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된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제3차 중동전쟁), 그리고 이슬람주의

 

이집트인들은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나세르는 개인의 욕망으로 이를 뛰어넘고자 아랍 민족주의를 주장한 측면이 있다. 당시에는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나세르는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집트가 아랍세계의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비 투자를 늘렸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홍해 바다에 쓸어버리겠다고까지 말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이스라엘은 선제공격으로 제3차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파란색)

 

 

이 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이스라엘군은 당시 카이로 코 앞까지 진격한다. 이스라엘 군의 규모상 모든 점령지에 병력을 배치하지는 못했으나 아주 효율적으로 싸웠고 승리했다. 아랍인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나세르의 리더십을 믿고 따랐음에도 이집트군이 약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는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1967년부터 주가가 폭락한다.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념, 이슬람주의(혹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슬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의 차이

 

아랍 민족주의는 아랍 민족이라는 대의에 충성하는 이념이다. 반면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하나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라의 명령'대로 살았던 시대에 대한 향수, 그들이 운영했던 광활한 제국(우마이야 왕조 등)에 대한 그리움이 이슬람주의를 불러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주의는 아랍 민족주의보다 더 큰 개념이다. 민족의 개념을 초월한다. 페르시아 민족인 이란도 이슬람주의 개념에 포함되는 집단이다. 

 

 

우마이야 왕조(661-750)의 세력권

 

실제로 아랍은 거대한 제국을 운영한 역사가 있고, 중동에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다. 무슬림 입장에서는 혹할만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란은 로마도 두려워하던 페르시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이스라엘은 유일한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자부심을 다른 것과 타협하지 않는다. 가령 중국이 중화의 우수성이 민주주의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많은 독재국가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더 나은 근대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중동국가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독재하던 사례가 많았다. 이런 민족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설득력 있는 비전이 필요했고 중동인들은 그것을 역사에서 찾은 것이다. 알라의 명령에 따라 살았던 시대에는 아주 짧은 기간에도 대제국을 건설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 문화의 특수성과 이슬람주의가 확산된 배경

 

중동은 국가보다 이슬람을 먼저 만들었다. 즉, 국가 공동체보다 종교 공동체를 먼저 겪은 살마들이다. 이슬람교는 7세기 신흥 종교로 태생했고,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탄진 제국 사이에 부족 단위로 살던 이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이들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 하나의 제국을 만들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세력권

 

 

즉 오랜 기간 동안 종교 원리에 따라 살아왔으며 서로를 동등한 무슬림 형제로 인식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국경이 그어지고 나라가 구분되어버린 것이다. 그전까지 중동은 종교 공동체가 나라를 구성했다. 종교와 나라가 분리된 적이 없었다. 로마의 경우 제국이 만들어진 이후에 기독교를 선택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종교 이전에 국가에 대한 충성, 법과 제도가 먼저 존재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교회법이 추가되는 형태로 제도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중동은 정반대였다. 종교의 계율이 추후 국가법의 기준이 되었고, 법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법을 해석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종교가 개입한다. 

 

이슬람 제국의 제1의 임무는 무슬림들의 신앙생활을 안전히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생계에 위협이 없도록 기본적인 의식주가 가능한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2가지 임무만 수행할 수 있다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슬람 제국 초기에 종교적으로 독실했던 칼리파들과 반대로 후기의 술탄들은 그다지 독실하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후기의 술탄들 역시 이 2가지 임무를 잘 수행했기에 이슬람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사우디가 미군을 자국에 주둔시켰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슬람주의에 따르면 지도자는 무슬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왕실의 안정을 위해 이교도들을 무슬림 영역에 끌어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역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서구의 공화정 제도를 섣불리 도입하다 몰락한 사례로 비판받아야 했다.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국가의 통치도 코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Mz8F2Fy68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