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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수니파, 시아파 무려 1400년간 싸우는 이유는? [중세특집#3] (MBC 박정욱 PD)

Varsika 2022. 6. 17.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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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신과 함께 2020년 방송(본문 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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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시작은 정치적 싸움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후계자(칼리파)를 지명하지 않고, 선출 방식도 정하지 않은 상태로 사망했다. 당시에는 종교와 정치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칼리파 역시 동일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 카톨릭과 이슬람을 비교하자면 후계자인 칼리파는 교황이고 술탄은 황제에 비교할 수 있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 물론 이 비교가 딱 맞아 떨어지는 표현은 아니다.

 

무함마드의 혈통은 쿠라이시(Quraysh)족인데, 혈통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뽑자는 측과 모범이 되는 종교인들 중 선출하자는 쪽이 나뉘었다. 전자는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를, 후자는 아부 바르크를 내세웠다. 결국 아부 바르크가 후계자로 선출된다. 아부 바르크는 무함마드의 장인이다. 그는 선출된 후 2년만에 사망한다. 후에 후계자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방식에 따른 이견이 대립했고 양측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천사들과 4명의 라시둔과 함께하는 무하마드(14세기 그림)

 

▷ 시아파는 시아투 알리(Shiatu Ali)라는 뜻으로 알리의 추종자를 뜻한다. 아랍어로 Shia는 무리, 집단을 뜻한다. 무하마드 사후 4대까지 정통 칼리파의 시대가 이어진다. 이 4명을 '라시둔(하나님이 올바르게 인도한 대리자들)'로 존경한다. 라시둔은 협의회를 거쳐 선출했다. 1대는 아부 바르크, 2대 우마르, 3대 우스만, 4대가 알리이다. 이들은 모두 무하마드와 같은 쿠라이시 부족이긴 했지만 같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무하마드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 역시 혈연 중심의 아랍 사회를 신앙 중심의 이슬람 사회로 변화한 것이었다.  알리가 암살된 이후에는 우마이야 왕조가 이어진다. (추가 끝)

 

결국 4번째 후계자로 알리가 선출된다. 알리가 지도자로 뽑인 이후 시리아 총독이던 무야위야(602-680)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완전히 처리되지 못하고 무승부(휴전)로 끝이 난다. 후에 무아위야(우마이야 왕조의 개국 군주)는 알리 사후 알리의 자손들을 내쫓고 세력을 축출한다. 이렇게 쫓겨난 알리의 세력(혈통 계승을 주장한 이들)이 바로 시아파다. 시아파는 이후 본인들의 권력을 수니파에게 빼았겼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빨강 : 예언자 무하마드의 시대 / 주황색 : 정통 칼리파 시대 / 노란색 : 우마이야 왕조 시대

 

 

▷ 무아위야는 알리를 암살하고 다마스쿠스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연다. 세습 칼리프 제도를 확립한다. 후에 아무이야 왕조는 압바스 왕조에 750년 멸망한다. (추가 끝)

 

수니파의 수니는 '순나'에서 온 것이다. 관행이라는 뜻이다. 무야위야가 우마이야 왕조를 개국한 이후로는 세습제가 굳어진다. 시아 입장에서는 본래 권력을 같고 있다가 탄압 당한 입장이다. 이후 시아파는 권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지하세계로 숨어들어 몰래 예배를 드리고 설교하며 세력을 확장한다. 시아파의 리더들을 '이맘'이라 불렀는데 이맘 역시 알리의 혈연 중에서 선출했다.

 

수니파에서도 이맘이라는 존재는 있다. 그러나 시아파처럼 전체 그룹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유대교의 랍비같은 선생인이다. 수니파에서는 시아파를 이단 취급하며 무시한다. 심지어는 이슬람교의 종파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아파의 정서는 현실의 권력자들을 '찬탈자'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 스스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시아파와 12이맘파, 그리고 종말사상

 

시아파에는 12이맘파가 있고, 마지막 이맘이 이맘 마흐디(Imam Mahdi)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흐디는 활동 중 사라지는데 전해지는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알라가 마흐디를 숨긴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맘 마흐디는 심판의 날에 다시 돌아온다는 종말사상이 있다. 실제로 시아파의 리더들은 수니파를 피해 숨어서 활동했다. 대리인들이 지도자들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기 때문에 시아파 신도들도 시아파 리더들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적 맥락은 마흐디에 대한 신성한 전승에 신뢰를 더했다. 

 

하디스(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무하마드 사후 무하마드의 최측근들이 구전을 모아 편찬한 책)에 따라 학파가 다양한데, 이는 코란의 분량이 적기 때문이다. 코란은 분량이 적어 성직자들이 다양한 해석과 설명을 덧붙여 이슬람교를 전파했고,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하디스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 종파가 나뉠 수 있다. 

 

많은 하디스 중 권위를 인정받은 하디스가 있다. 어떤 하디스에는 마흐디 신앙이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있는 알 아마크(Al Amaq)다비크(Dabiq)에서 로마군과 마주치는 때 알라가 이맘 마흐디를 보내 세상을 심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IS 역시 이것을 알고 있고 서양 세력(로마군)과 알 아마크나 다비크에서 마주치는 날 세상이 끝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 마흐디는 기독교의 메시아, 불교의 미륵과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마흐디를 대신한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개념이다. 코란에는 마흐디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존칭어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흐디가 종말론적 인물을 뜻하게 된 것은 후대에 와서다.

 

 

IS의 창시자 중 하나인 알자르카위 역시 "이라크에서 시작된 불꽃은 알라의 뜻에 따라 계속 뜨거워질 것이다. 다비크에서 십자군을 태워버릴 때까지"라는 말을 남겼다. IS는 실제로  2015년 이라크 동북부의 모술을 장악하고도 요충지 바그다드로 향하지 않고 시리아 서북부 마을 다비크로 향했다. (추가 끝)

 

수니파에도 이런 종말사상 믿은 집단이 있긴 하다. 사담 후세인이 물러난 이후 수니파와 급진 세력이 이라크 땅에 IS를 만들었다. 그 세력이 시리아까지 뻗쳐 들어갔으며 결국 시리아 땅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IS는 끝까지 시리아를 중요시 했다. 앞서 말한 두 개의 도시가 시리아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을 때, 미군과 같은 서양세력이 개입한다면 그들은 심판의 날이 펼쳐진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종말론을 믿었고, 거기다 종말론이 곧 들이닥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시아파가 비교적 종말사상이 더 강하다. 오랫동안 시아파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집트 지역에 파티마 왕조가 시아파 국가이긴 했지만 과거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더 강했지 이슬람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진 못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오랫동안 비주류로 살아왔던 시아파는 여전히 권력과 싸우는 순수한 세력이라는 자기정체성이 강하다. 수니파는 스스로가 정통 이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시아파는 정통성을 빼았겼다고 인식하고 있다. 시아파가 많이 몰려 살던 곳이 이라크 남부다. 카르발라, 나자프와 같은 시아파 성지가 모두 그쪽에 있기 때문이다.

 

파티마조의 영역과 카르발라, 나자프의 위치(가운데)

 

 

16세기에 오스만 술탄이 수니파의 지도자였다. 이때 이스마일 1세가 지금 이란 땅에서 부흥한다. 이때 이스마일 1세는 오스만 술탄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수니파 신도들을 모두 시아파로 강제 개종시켰다. 당시에는 이란 땅에 수니파 신자들이 훨씬 많았다. 개종하지 않으면 잔인하게 죽였다. 수니파들의 반란을 제압한 후에 반란군을 꼬치에 꿰 불에 태워 죽인다음에 자신의 신하들에게 먹였다.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이란 지역은 아직까지도 시아파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스마일 1세의 행보 이후 이란은 시아파와 페르시아 고유의 문화가 섞여 지금은 마치 시아파가 이란의 특성처럼 인식되고 있다. 

 

 

 

시아파의 특징

 

시아파는 가톨릭과 같이 성직자들간의 서열이 있다. 서열에 따라 말의 권위가 부여된다. 반면에 수니는 알라 앞에 모든 신자들이 평등하다. 이 때문에 쉽게 말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상황이 발생한다. 오사마 빈라덴과 같이 극단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서열이 없다. 

 

시아파 성직자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아야톨라(Ayatollah)라고 하는데 마치 가톨릭의 교황과 비슷하다. 교황청이 동성애나 낙태와 같이 특정 사안에 해석과 입장을 내면 그것이 곧 가톨릭의 주류가 된다. 시아파도 마찬가지로 아야톨라가 해석을 내놓으면 그것이 곧 시아파의 해석이 된다. 이 덕분에 극단적인 사상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민주주의 시위

 

시리아는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세속주의 국가로 출발하였으나 부족주의와 종교가 결합되어 아직까지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적 선출이나 객관적 기준으로 권력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알라위파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이후 쿠르드족의 주도로 쿠르드 대통령, 시아파 총리을 선출했다. 수니파 중에서는 후세인과 가깝지 않았던 이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지금 이라크 내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데 국민의 뜻에 상관없이 세력들이 권력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과거 레바논 내전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일어났다. 레바논 내 마론파 인구는 계속 줄어드는데 대통령은 마론파에서만 배출되었기 때문에 대의민주주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에서는 종파를 뛰어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 다만 중동은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강력한 문화를 갖고 있고, 다른 국가들의 사례(유럽 등)를 비추어볼 때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경제가 발전하고 상공업 인구가 많아질 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지금은 저개발 상태라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역사

 

이집트는 오랜 세월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보니 쌓인 분노가 있었다. 이슬람을 통해 변화를 꾀한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기독교의 YMCA처럼 젊은이들을 모아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결사체를 만든다. (1928년) 스포츠 클럽을 만들고 근대화된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풍적인 지지를 받아 곳곳에 지부가 생긴다. 인원이 많아지면서 결국 정치개입에 대한 목소리도 커졌다. 각 국의 의회에 진출하여 이슬람 강령을 실현시키자는 주장이 쏟아진다.

 

사이드 쿠틉(1906-1966)

 

이중 사이드 쿠틉 같은 인물은 공공연하게 혁명을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경험했지만 오히려 서구 문명을 타락을 보고 이슬람 급진주의의 대표주자가 된다. 사회주의로 치자면 마르크스가 아닌 레닌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레닌이 혁명사상, 혁명교본으로 발전시킨 것과 같이 사이드 쿠틉은 이슬람 혁명 사상을 전파한다. 결국 이집트 나세르 정권에 의해 사형을 당한다. 

 

▷ 무슬림 형제단은 나세르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했고, 이후 나세르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쿠틉 역시 쿠테타 혐의로 체포되었다. (추가 끝)

 

당시 아랍권은 공화정이 부각되면서 아랍 민족주의의 부흥기였다. 왕정 철폐에 민감한 사우디는 공화정의 탄압을 받는 이슬람주의자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무슬림 형제단의 급진세력들이 모두 사우디로 이동했다. 이들은 항구 도시 제다의 대학에서 강연을 하게 된다. 이들의 새로운 사상에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열광한 젊은이들 가운데 오사마 빈라덴도 있었다.

 

 

1979년에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사실 혁명의 조짐은 그전부터 있어왔고 1978년 12월쯤 되면 거의 혁명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이란은 시아파 국가였지만 이때 수니파 신자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자신들이 이단으로 취급했던 시아파마저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수니파도 혁명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각국의 집권세력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사우디 왕정이 그랬다. 당시에는 오일 달러로 왕정이 매우 부유할 때였으며 사우디 건국 자체가 와하비즘(이슬람주의 세력 중 하나)과 사우드 가문이 결합해 이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나라였으나 오일 달러로 인해 왕가에서는 종교 색채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우트 쿠틉은 사우디 왕가를 비판하기도 했다. 

 

 

 

사우디 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그랜드 모스크에 총을 들고 들어가 점거해버린다. 그곳에서 사우디 왕가는 물러가라는 시위를 펼친다. 이슬람 제 1의 성지가 빼았긴 것이다. 성전의 파손을 우려해 고민했으나 결국 사우디 왕정은 유혈 진압을 선택한다. (1979년)

 

이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슬람 형제의 땅에 이교도들이 침공한 것이다. 이슬람 형제들을 돕자는 운동이 전 아랍권에 일어나고, 같은 생각을 갖고 국경을 초월해 만난 무슬림 형제들이 소련과 밤낮으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소련을 물리쳤다. 알라에 뜻에 따라 싸웠더니 세계 초강대국 중 하나인 소련을 물리친 것이다. 이들은 10년간 쌓아온 전사의 경험을 갖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이들로 말미암아 중동 곳곳에 이슬람주의가 강하게 번지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혁명의 대학교로 불린다. 혁명 사상이 이곳에서 급진화, 실전화되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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