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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에르도안을 이해하면 터키를 알 수 있다 [중세특집#7](MBC 박정욱PD)

Varsika 2022. 6. 2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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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신과 함께 2020년 방송(본문 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터키와 투르크 민족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다. 그 이전에도 투르크 민족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터키 이전에도 투르크 제국들이 있었다. 본래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유목민들이었다. 현재 스탄 국가로 불리는 많은 국가들이 투르크 계열이며 중국의 신장 위구르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타타르족이라고도 불렀으며 몽골에도 투르크계 후손이 살고 있다.

 

흔히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유목민족으로 훈족이 알려져 있다. 몽골과 터키는 서로 훈족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몽골의 주장에 따르면 흉노가 훈족, 터키의 주장에 따르면 타타르가 훈족이라는 것이다. 다만 확실히 확인할 방법은 없다.

 

튀르크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주름잡던 세력으로 여러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과거 로마가 게르만 용병을 고용했듯이 아랍인들은 제국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이후 투르크계가 군권을 장악하여 아랍계 칼리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린다. 이후 투르크계 술탄들이 현재 중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 이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유지된다.

 

 

오스만 튀르크의 해체와 아타튀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손을 잡았다가 패전 후 해체된다. 이 시기 그리스가 터키와 전쟁을 치른다. 오스만의 소아시아 지역은 그리스가 19세기 오스만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를 그들의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치 오래전 그리스가 트로이를 공격했던 것처럼 터키를 공격한다. 그러나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이 그리스 군을 격퇴시키고 오히려 전쟁 전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아랍인들은 이름에 성(姓)이 없다. 사우디의 무하마드 빈 살만은 '살만의 아들 무하마드'라는 뜻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경우도 '라덴의 아들 오사마'라는 뜻이다. 아랍 사람들은 조상의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다. 주로 아버지의 이름, 혹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온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를 유럽과 같은 민족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터키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터키 이름에도 성을 사용토록 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성은 아타튀르크인데 이는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를 비롯해 무스타파 케말은 서구화, 세속화, 근대화된 터키를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각 지역 출신들에 모두 섞여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제국이 해체된 후에도 터키 내에도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에도 많은 터키인들이 살고 있었다. 터키인들로 구성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무스타파 케말은 그리스와 협상하여 수십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 내 터키인을 터키로 입국시킨다. 동시에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로 돌려보냈다. 국가 내 터키인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케말은 이처럼 유럽식 민족국가를 만드는데 굉장히 집착했다.

 

이후 케말은 권력을 잡고 일당 독재로 나라를 통치한다. 세속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이슬람을 비롯해 종교에 기반한 정당은 정치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 등 다양한 제도를 모두 세속 기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대한 요구는 갈수록 강해졌다. 이후 갈등이 격해지고 군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군부는 '케말리즘'이라고 불리던 터키식 세속주의가 근대화된 터키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여겼다. 터키 군부는 총 3번의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3번 모두 쿠데타 이후에 민정이양의 약속을 지키고 군으로 복귀했다. 이 때문에 국민적 존경을 받았다. 총 4번의 쿠데타가 발생할 뻔하였으나 1번은 군부의 개입 직전에 터키 국민의 힘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 쿠데타가 실행되지는 않았다. 

 

터키가 민주화된 후에는 기득권 세력의 권력 독점에 대한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Deep state, 에르게데콘(터키 신화에 나오는 비밀의 골짜기)로 표현되는데 겉보기엔 알 수 없는 깊은 곳에 실제 터키를 움직이는 카르텔이 있다는 의미였다. 핵심인사들은 군부, 정보기관, 사법부들이며 이들의 네트워크가 터키를 통치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1990년대에 터키는 혼란에 빠진다. 쿠르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더 거칠어졌다. PKK라 불리는 쿠르드 노동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가진 분리독립주의자들이다. 이들과 터키 정부 간의 갈등은 거의 내전 수준으로 격화되었고, 이를 빌미로 군부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슬람주의와 에르도안의 등장

 

8대 대통령 외잘은 터키의 EU 가입을 추진하고, 이를 위하여 쿠르드와도 평화협정에 들어간다. 그의 외가가 쿠르드 계통이라는 설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터키는 계속 유럽이 되고 싶어 했다. 외잘 대통령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날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아직도 그가 독살당했다는 말이 있다. 외잘 대통령을 시작으로 당시 평화교섭을 진행하던 각료들도 잇따라 사망한다. 누가 봐도 암살임을 알 수 있었다. 항간에는 에르게네콘이 마피아와 손을 잡고 일을 벌였다는 추측도 있다. 겉으로는 케말리즘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그들만의 카르텔만 공고히 했다는 비판이 생기기 시작했다, 

 

 

투르구트 외잘 터키 대통령

 

이후 터키 경제가 불황을 겪게 되면서 운동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터키는 학교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했는데 시위에 나온 여학생들은 히잡을 착용하며 저항했다. (다른 중동 국가와는 반대의 양상이다) 이들의 저항은 에르게네콘을 향한 것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네흐메틴 에르바칸(네지메틴 에르바칸)도 시위를 지지했다. 에르바칸은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한국으로 따지면 권영길 같은 정치인이다. 군부는 그를 이슬람주의 자라 고공 격하였지만 에르바칸은 법망을 잘 피해 가며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지지율도 높았다. 국민들은 그를 청렴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 자니까 오히려 더 깨끗할 것이라는 생각)

 

터키는 1990년대 내내 폭탄테러가 일어났고, 경제도 불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2001년도에 IMF 구제금융을 받는다. 이즈음 하여 에르바칸의 후계자인 에르도안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이슬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출마한 뒤 파란을 일으켜 당선된다. 처음에는 아무도 당선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에르도안이 출마할 무렵의 이스탄불은 인프라가 열악했다. 수도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수준이었고 교통도 엉망이었다. 즉, 기본이 갖추어지지 못한 곳이었다. 에르도안은 당선 뒤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를 통해 이를 해결했다. 이는 에르도안의 대표적인 치적이 되었다. 운동권과 지지자들은 이슬람주의자 시장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성과도 좋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1994년 총성에서 에르바칸의 복지당이 제1당이 된다. 이후 탄력을 받아 그가 총리에 선출된다. 이슬람주의 총리가 당선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에르바칸은 아주 강한 이슬람주의자였다. 나토를 탈퇴하고 이슬람 국가 간의 안보동맹을 체결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군부와 세속주의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에르바칸은 서구의 G7처럼 D8(개도국 8개 국가)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아주 위험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주장이었다. 결국 군부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해 복지당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버린다. 에르도안은 이에 반발하다 시장직에서 쫓겨나고 4개월간 수감된다. 이후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와 결별을 선언한다.

 

 

에르도안의 도광양회

 

출감 이후 에르도안은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를 내세우며 새로운 정당인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한다. 정의개발당은 다른 민족주의자와 협치를 통해 원내 세력을 키운다. 당시에는 에르도안의 피선거권이 박탈된 시기였기 때문에 동료를 내세워 총리로 만들고 후에 법을 개정하여 자신이 총리가 된다. 에르도안 집권기에 터키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2002년 1인당 GDP가 3천 달러 수준이었는데 2012년에는 1만 2천 달러 수준으로 올라선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여기에 대해서는 2001년 IMF 당시의 개혁과제가 이미 진행된 후에 에르도안이 집권했고, 결국 그 과실만 가져갔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운도 좋았으나 능력도 있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다. 특히 에르도안의 총리 집권 시기에 그는 이슬람주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EU 가입을 주장했고 이를 군부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하므로 군부의 정치개입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에르도안은 군부를 통제한 다음 서구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이후 정권을 재창출하였고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빌미로 군부 엘리트들을 숙청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귈렌주의자들을 등용한다. 귈렌주의자들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사이에 위치한 이들이다. 에르도안은 언론, 군, 경찰 조직의 요직에 귈렌주의자들을 꽂아 군부 엘리트들을 숙청했다. 에르도안과 귈렌주의자들의 연정이 된 것이다. 

 

2016년에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터키 정부는 이 쿠데타가 귈렌주의자들이 일으킨 쿠데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부 내 귈렌주의자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다. 이로써 2003년부터 2016년까지 에르도안이 용의주도하게 준비했던 도광양회가 완성되었다. 10년 동안 자신의 야망을 숨긴 것이다. 귈렌주의자들은 미국으로 망명가 버렸다.

 

▷ 귈렌주의자들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학자 펫훌라흐 귈렌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귈렌은 과거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2010년 무렵부터 갈등이 촉발되었고 이후 정적이 되었다. 터키 정부는 2016년 쿠데타의 배후로 귈렌을 지목했고 터키 검찰은 궐석 재판에서 귈렌에게 종신형 2회 + 1,900년형을 구형하였다. (추가 끝)

 

귈렌주의자들이 사라지자 에르도안은 이슬람 색채를 마구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잡 착용 허용을 비롯하여 아랍어로 예배를 하는 것도 허용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민족주의를 부흥시키기 위해 터키 글자를 만들고, 터키어로 코란을 번역했다. 그리고 이슬람 예배도 터키어로만 허용하였는데 에르도안이 이러한 세속주의 정책을 모두 폐기했다.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는 외교정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르도안 외교는 네오 오토마니즘, 신 오스만주의라고 볼 수 있다. 케말리즘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 오스만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집중한다.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그곳이다. 과거처럼 더 이상 유럽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과거의 터키는 (쿠르드 문제 외에는) 중동에 관심이 없었다. 유럽의 일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터키 없이 중동 정치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EU는 지나치게 터키에게 까다로웠다. 가입을 시켜줄 것처럼 하다가 반려하곤 했다. 터키는 이제 희망고문을 스스로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최근의 터키와 러시아, 미국

 

최근 터키 경제가 불황을 겪으며 다시 에르도안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 터키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미국은 터키에 전술핵을 배치했을 정도 사이가 좋았는데 에르도안은 트럼프와도 갈등을 빚는 등 관계가 예전만 하지 않다. 터키는 과거 제국을 모습을 보이려 한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에르도안은 보통 스트롱맨이 아니다. 터키는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제재를 가할 수 있으나 푸틴은 그냥 에르도안을 방치하고 있다. 터키가 미국과 사이가 벌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19년 시리아 내전 상황 / 2020년의 전선 상황

에르도안은 중동 정세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정부군 VS 반군)은 이미 사실상 종결되었는데 지금은 시리아 정부군 VS 터키군이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리비아에도 파병한 상태다. 시리아와 리비아 모두 러시아 세력이 진출한 곳이다. 공식적으로 러시아군이 파병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 용병을 고용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지에서 터키군은 러시아의 반대쪽을 지원하면서 근육질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중동에서 이란, 이스라엘 정도를 제외하고는 터키를 군사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최근 터키 국내 선거에서 이스탄불과 앙카라 모두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에르도안은 이스탄불에서 신예 정치인이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고 트집을 잡아 재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더 큰 표 차이로 야당 후보가 승리했다.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날의 에르도안을 만들어준 것은 이스탄불 시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다. 

 

외신에서는 에르도안을 술탄이라고 표현한다. 2023년 대선에서 다시 승리할 경우 에르도안은 2028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이미 2017년 그는 총리에 분산된 권한을 대통령에게 몰아주는 내용의 개헌을 결행했다. 대권에 대한 강한 야망이 보인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는 생각이 분명해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Ixe908k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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