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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파이아키아] 인구가 바꾼 세계사의 흐름 10

Varsika 2022. 7. 9.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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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2022년 1월 26일 방송(본문 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인구에 대한 통계가 가장 오래된 곳은 영국이다. 생명 보험사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18세기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인구, 사망률, 출생률 대한 자료가 보험회사에 필수였기에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통계를 갖고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폴 몰랜드의 <인구의 힘>을 참고했다. 

 

1. 인구혁명의 시작

현재 지구 인구는 78억 명에 달한다. 카이사르 시대의 세계 인구는 2억 5천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18세기 후반에도 10억 명이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인구가 이제 8배나 급증한 것이다. 모두 최근 200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인구 폭증의 패턴이 처음에는 영국에서 발생해 유럽, 북미, 아시아로 퍼졌다. 때문에 학자들은 인구 혁명이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19세기 초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1백 년 동안 인구가 4배나 늘었다. 그 시기에 해외로 나간 인구를 제외하고 순수 국내 거주 인구만 포함한 수치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다산이 지배적인 상황이었다.

 

프랭크 노트스타인의 <인구전환가설>에 따르면 과거에는 출생률이 높아도 사망률도 높았다. 이후 어떤 지점에 이루게 되면 사망률은 떨어지고 높은 사망률이 유지되어 인구가 폭증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인구 폭증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이후에는 특히 선진국에서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2.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한 영국

1800년에는 유럽인구의 20%가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100년 동안 영국이 4배의 증가를 보이는 반면, 프랑스는 인구면에서 영국에 뒤쳐진다. 과거 프랑스가 나폴레옹 시대 전 유럽을 위해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인구가 뒷받침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영국이 인구 폭증을 맞을 수 있었던 계기는 18세기 산업혁명이었다. 멜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인류를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 개척으로 위기를 해결했다. 만약 맬서스가 시골이 아닌 도시에 살았다면 다른 주장을 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맬서스는 당시 자국 내의 토지 생산량만을 고려했던 것이다. 

 

극적인 산업화와 인구가 폭증하는 순간(영아사망율이 낮아지는 순간)이 만나 영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중국 역시 한동안 산업화가 어느 수준까지 오르지 못하였으나 최근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양강체제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3. 정복했지만 장악하지 못했던 스페인

 스페인 역시 중남미에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장악하지는 못했다. 반면 영국은 군사력과 과학기술 그리고 풍부한 인구를 바탕으로 식민지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가 정책으로도 인력을 파견했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도 기회를 찾아 떠났다. 상품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수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는 여전히 앵글로 색슨이 주류로 남아있다. 

 

페르낭 브로델은 "스페인은 중남미를 정복할 수 있지만 장악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영국보다 훨씬 먼저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없었다. 영국의 식민지들은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했으나 스페인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19세기 독립을 맞게 된다.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때 영국과 스페인은 전쟁을 치렀는데 당시 스페인의 인구가 영국의 2배였다. 그러나 3백 년이 지난 19세기에는 영국의 인구가 스페인 인구의 2배가 되었다. 3백 년 만에 4배의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이후 스페인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지 못했다. 

 

 

4. 미국의 수월했던 영토확장

미국은 급격한 영토 팽창(루이지애나 매입 등)을 겪었지나 스페인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다. 심지어는 캘리포니아를 병합할 당시에는 이미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많았다. 루이지애나를 프랑스가 미국에 헐값에 팔았던 이유 역시 매입 당시 루이지애나 내에 프랑스인보다 미국인이 100배 정도 많았다. 당시 미국의 합계 출산율은 7명을 기록했다. 거기다 미국은 이민까지 받았다. 19세기에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만 800만명에 달했다.  덕분에 미국은 수월하게 북미 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5. 두 차례 세대 대전을 일으키고도 모두 패배한 독일

20세기 초반이 되면 영국의 출생률이 떨어지게 된다. 가장 빨랐던 인구 폭증의 부메랑을 가장 먼저 맞게 된 것이다. 후발 국가 중 가장 빠르게 인구가 증가한 나라는 독일이다. 통일국가를 형성한 것 자체가 늦었기 때문이다. 1871년에 정치적 통일을 이루고, 비스마르크는 노령연금을 만들고 복지, 교육제도를 정비하면서 독일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과거 영국보다도 더 격렬한 증가를 보인다. 

 

반면 프랑스는 여전히 농업이 강한 국가였기 때문에 산업화에 대한 속도가 늦었고, 피임법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빠르게 대중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1800년도에는 프랑스가 독일보다 인구가 많았으나, 19세기 역전된 이후 여전히 독일이 인구면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은 전선에서 참호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연합군의 가용병력은 동맹군의 1.75배였다. 덕분에 연합군은 독일을 꺾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참호전은 끊임없이 병력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 이후에는 러시아가 인구폭증을 겪게 된다. 이 때문에 독일은 소련을 두려워하게 되고 1941년에 독소전쟁이 발발한다.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결국 승리했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의 병사는 1300만명이었고, 소련이 동원한 병사는 3700만 명이었다. 독일의 병력은 서부/동부 전선으로 분산되었으나 소련은 오로지 독일과만 싸웠기에 그 병력의 차는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19세기 말의 러시아 여성의 합계출산율도 7명에 달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시골지역은 20세기 중반까지 출산율이 높았다. 도시와 농촌 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남) 거기다 소련은 대가족제, 종교 등이 인구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6.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한 소련

인구는 숫자도 중요하지만 구성도 중요하다. 소련군의 구성은 러시아인이 적고 소수민족 비중이 높았다. 사회 중심에 있던 러시아인의 충생률은 낮아졌기 때문이다. 소련군의 상당수가 다민족 출신이었기에 러시아어를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이미 소련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단계였다. 소련의 중위연령은 33세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꽤나 높은 수준이었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의 중위 연령은 16세에 불과했다. 인구증가율 역시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10배에 달했다.

 

 

7.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

미국은 다인종 국가이지만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백인 투표자 중에서는 매케인의 지지율이 55%, 오바마 지지율은 43%수준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백인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 57%에 불과한 수준이다. 덕분에 오바마는 당선될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히스패닉과 흑인, 아시안 정치인들이 선출되기 용이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8. 세계를 휩쓴 베이비붐

미국의 경우 최대 승전국이자 경제 호황기를 맞아 경제에 대한 자신감으로 조혼풍습이 생겼다. 따라서 출산연령이 낮아져서 합계 출산율이 높아졌다는 설이 있다. 높은 출산율은 대중문화의 확산과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1950~60년대는 인류 역사 최초로 청소년 문화가 태생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비틀스도 이때 탄생했다. 비틀스, 청바지, 제임스 딘과 같은 대중문화의 폭증과 베이비붐 세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1965년 미국은 인구의 절반이 25세 미만이었다.

 

 

9. 교육수준과 피임기구 그리고 출생률

1965년 경구 피임약이 시판된다. 이를 계기로 베이비붐이 끝나기 시작한다. 과거 이집트에는 수유 기간 동안 배란이 억제되는 것을 이용해서 수유 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10. 서구의 쇠퇴

인류의 역사를 길게 보자면 서구가 힘을 가진 시기는 길지 않다. 19세기 이후 영국이 주도한 제국주의적 팽창 이후의 역사 이후에 서구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1800년만 하더라도 중국 해안가의 주민과 서유럽인들의 생활 수준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1900년 경에는 경제력의 차이가 10배 이상 벌어지게 된다.

 

지금은 아시아의 인구가 폭증하고 있구 오랜 세월이 지나면 아프리카로 패권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wtu29qtf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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