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 근현대사]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국가주도형 경제개발 정책 수립)

Varsika 2023. 10. 2.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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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제를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형상임(국가주도형 경제개발 정책). 계획경제나 사회보장제도는 모두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온 것이다. 

 

* 경제개발계획은 성장에 역점을 두었고 분배를 고려하지 않았다. 

* 재무부 및 경제기획원에서 주도하였고 한국은행은 금융정책의 자율권과 주도권이 없었다. 

* 재벌을 육성하기 위해 보조금 정책을 펼쳤다. 

 

○ 5.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

이승만은 장기집권 야욕으로 발췌개헌(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3선 개헌을 밀어 붙인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이루어지고 이에 반대한 시위가 이어진다. 같은 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후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 들어선다. 장면 정권은 의원 내각제였다. 오래지 않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국사혁명위원회는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꾼다. 박정희는 민정 이양을 약속했으나 본인이 전역 이후 출마했고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이 탄생한다.

 

○ 한일협정(1965)과 경제개발

도덕적 정당성이 없었던 쿠데타 정권은 반공과 민족주의, 절대빈곤 타파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경제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데 이는 사상계 등 지식인들의 집단 반발을 야기했다. 일본과 국교 회복에 대한 노력을 본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을 승인한다. (1961년 11월). 그러나 취임 초기 내걸었던 명분 중 반공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으나 민족주의는 퇴색되고 말았다. (미군정, 이승만 정부 때에도 국교정상화 논의가 있었으나 보상금 문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 당시 경제 상황

1) 원조 경제 - 삼백산업

미국의 원조로 원자재를 얻고 이것을 재가공하여 밀가루, 설탕, 면직물을 만드는 구조였다. 미국을 통한 끊임없는 원자재 공급이 필수였으나 1957년 이후 급격히 원조가 감소함으로써 큰 위기에 봉착했다. 

 

○ 경제개발 5개년 계획(1-4차)

1차 1962년부터 1966년까지 / 표면적 성과보다 선언적 의미(종잣돈 부재)

2차 1967년부터 1971년까지 / 한일협정, 베트남 파병, 비약적 발전

3차 1972년부터 1976년까지 / 8.3조치, 10월 유신, 중화학 공업

4차 1977년부터 1981년까지 / 1979년 박정희 서거

 

-. 2차 경제개발계획 때 1차 계획의 한계를 극복하고 수출주도형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산업구조를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재편하였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 9.6%를 기록하였고, 수출주도형체제를 확립하였다. 

 

-. 3차 경제개발 계획 때는 1971년 닉슨쇼크(달러 금태환 정지,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로 전환), 1973년 제 1차 석유 파동 등으로 어려운 고비를 겪었다. 외자도입 급증과 중동건설 등으로 난국을 돌파했다. 같은 시기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경제가 힘들었다.

 

-. 1972년 8.3 특별긴급경제조치

: 8월 9일까지 신고된 기업들의 부채를 3년간 상환 유예, 3년부터 5년에 걸쳐 월치 1.35%로 분할상환하게 해주며 정부가 조달한 2,000억원으로 기업의 단기은행 부채 30%를 연리 8%에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형식으로 대환처리하는 것. 기업 부채를 탕감해주는 것으로 금융 투명화에는 악영향을 미쳤지만 기업활력은 높이는 결과를 가져 왔다. 

 

3차 경제개발계획 때에도 연평균 9.7%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고 1~2차 성괄르 통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본이 중화학 공업을 추진했다가 환경문제(이따이이따이 병) 등으로 축수 수순에 들어가자 한국이 비교적 수월히 산업이 입지를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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