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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흐르다(최진석)

Varsika 2023. 11. 1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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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 나는 경계에 있을 때만 오롯이 '나'다. 경계에 서지 않는 한, 한쪽의 수호자일 뿐이다. 정해진 틀을 지키는 문지기 개다. 

 

-. 한쪽을 붙잡은 채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경계에 흘러야 주체는 튀어 오르는 탄성을 가질 수 있다. 탄성은 경계의 자손이자 위대함을 격발 하는 방아쇠다. 대붕은 9만 리를 튀어 오르는 내내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 교육의 핵심이 무엇일까? (...) 밖에 있는 별을 찾아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 주실 떄마다, 호명되는 학생은 그 순간에 고유한 자신의 이름 앞에서 이 세계에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는 경험을 한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일이야 말로 진정한 교육이 가야 할 길일 것인데, 그 일은 커다란 목소리나 화려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하다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이름 불러 주기'로 완수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내가 우리 속에서 용해되지 않고 고유한 나로 존재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 이미 지나간 것에 갇혀 있다면 예쑬가가 아니다. 예술가가 정치가나 이념가로 전락하는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혁명가였던 사람이 혁명의 기억에 갇히면 반항아로 전락하듯이, 예술가도 과거 자신이 했던 창조의 기억에 갇히면 기예가나 화공으로 전락한다. 

 

-. 변혁은 변혁가가 스스로에게 '뚜껑'을 덮지 않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변절을 감행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혁명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따라 계속 변절하는 힘의 활동일 뿐이다. 

 

-. 친구들 모두 튼튼한 입지에 내린 뿌리를 뽀지 않고 거기서 안정되고 편안하고 따뜻할 때,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결정해 버린다. 갈등의 구조 속으로 나는 가자! 혼자여도 가자! 그는 운명처럼 혼자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 배신자라고 해도 쓸쓸하게 혼자 떠난다. 영웅은 그래서 외롭다.(49)

 

-. 정해진 곳 안에서 '우리'로 지내는 일이 이미 생명의 활기를 놓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그 '우리'를 벗어나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고독'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변화'를 놓친 맥 빠진 '우리'들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자태를 시키면서도 나는 그저 쓸쓸할 뿐이다. 그래서 장자는 최고의 인격을 이렇게 표현하더라. "봄날처럼 따뜻하면서도, 가을처럼 처연하구나."

 

-. 동물이든 자객이든 인간이든 삶의 완벽함은 '적중'에서 나온다. 이 '적중'은 몸을 비틀어 꼬임의 상태로 스스로 몰고 가서 '동작'으로 생산되어야 만날 수 있는 최종 경지다. 움직이는 세계에서 '적중'이라는 완성을 이루려고 한다면, 자신도 진동의 맥을 따라 함께 움직여 주어야 한다. 움직임은 불균형이고 동작이고 힘이다. 

 

-. 문제는 선악 판단이 명료해지면서 이것이 도덕적 우월감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일은 적을 하나 줄이고, 친구를 하나 늘리면서 해나가면 성공한다. 

 

-. 글이라는 것이 결국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손님의 태도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것이 나와야 마땅하다. 

 

-. 내가 작동되지 않는 지식은 항상 나를 배신한다. 나의 재미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서 감탄하고 수긍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진정으로 즐길 수는 없다. 

 

-. 성공한 사람에게 큰 적은 성공'기억'이다.

 

-. 어느 날 유방은 참지 못하고 "나는 말 잔등에 올라탄 채 천하를 어덩ㅆ다. 뭐가 부족해서 내가 <시경>이니 <서경>이니 하는 따위를 들어야 하느냐? 고 육가를 힐난했다. 그러자 육가는 말한다. "폐하는 말 등에서 천하를 얻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말 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사마천은 유방이 육가의 이 말에 "언짢아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라고 전한다. 내 생각에 유방의 모든 업적은 바로 이 '부끄러운 기색'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육가의 말을 알아들었다. 승리의 기억에도 갇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황제라는 지위가 주는 거만한 관념에 갇히지 않고 오로지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기색'을 가질 수 있었다. 

 

-.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하는 사람이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하려고 덤비기 때문이라고 갈파한 함석헌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 한없이 배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원심력을 타느라 정작 지성의 중력은 상실해 버린다.

 

-. 업의 정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전인격적 태도로 대하느냐, 아니면 기능적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달리진다. 전인격적 태도는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정해진 일만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의 궁극적인 의미를 살펴서 거기에 온 마음을 두고 기꺼이 불편함과 수고를 받아들여 조그마한 확장성이나마 시도해 보는 것이다. 

 

-. 이제 알겠다. 위대한 고전들은 다 자기 자신처럼 산 사람들이 남긴 결과라는 것을. 

 

-. 얼치기 철학은 현실을 떠나지만, 진정한 철학은 현실로 돌아온다. (칼 야스퍼스, <실존철학>)

 

-. 철학적 시선에서 박물관을 감상한다는 것은 하나하나를 보는 일이 아니라, 박물관 전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놓고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유물을 남긴 사람들이 드러내 보여주는 '동선'을 읽는 일이다. 유물들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나타나는 무늬, 즉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보는 것이다. 한국 박물관에서는 한국인들의 동선을 읽고, 중국 박물관에서는 중국인들의 동선을 읽는다.

 

-.  진정한 철학은 현실로 돌아오지만, 얼치기 철학자는 철학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관념의 세계가 진리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봄'이라는 개념이 잘 소통된다고 해서 '봄'이 실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 나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기다림이 있다. 단 한 명이라도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 자기가 꿈꾸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 정도로 정련된 나를 만나게 해주려 부단히 애쓰고 있다. (...) 결국 그 사람의 내면과 함량이 어떠한가 가 관건이다. (...)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그 사람의 지성적인 높이를 결정한다. 또한 삶의 수준과 시선의 고도를 결정한다.

 

-. 독립된 인격의 터전은 결국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 모든 것이 창조자에게는 유동적인 것으로 존재하지만 수용자에게는 특정한 의미로 고정되어 버리기 쉽다. 모든 이념도 생산자에게는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지만 수입자에게는 불변의 수호 대상이 되어버린다. 

 

-. 문자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보다도 문자를 창조할 때 도달해본 적이 있는 지성의 높이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 송나라는 은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유학의 기풍이 강했다. 고대 유가적 성왕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나라였다. 그래서 시선은 줄곧 과거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송나라의 양공은 과도한 명분과 고대 성왕들이 제시한 기준만 지키다가 대패하기도 한다. 여기서 한심한 도덕주의자나 명분주의자를 빗대는 송양지인이라는 말이 나왔다. 

 

-. 온고의 중력을 이길 내공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대개는 온고만 하다가 세월 다 보낸다. 그래서 이 말은 차라리 순서를 바꾸어 '지신온고'가 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 결국은 손발을 움직이는 일이다. 행동이다. 무모함을 통과하지 않고 빚어진 새로운 역사는 없다. 

 

-. 전술적 차원에서는 항상 판이 짜지고 디자인되기를 기다리는 데에 익숙해서 상황의 변화에 덜 민감하고 어떻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습성이 생긴다.

 

-. 시詩에 자신을 맞추기 바빠 자신에게 시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시'가 주인이 되어 버린다.

 

-. 현실은 떨구어 버리고 창백한 이론만 가져온다. 결국 고향을 떠난 철학 이론만을 철학으로 여기다가, 현실과 이론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두께를 경험하지 못한다. 사유를 사유하지, 세계를 사유할 줄 모르게 된다.

 

-. 단순함에 빠지면 우리의 운명을 상대방에 선의에 맡겨 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는 우리 힘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판조차 펼치기 불가능한 매우 처참한 지경에 이미 빠져 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 왈, "일본은 유학사상을 우리보다 잘 연구해서 도덕적 성품이 높아졌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나쁜 습관이 사라질 것이다.")

 

-. 변화를 통과하여 미래를 향해 탄력을 받아 튀어 나가려면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 반성은 과거와 벌이는 전면적인 투쟁이다. 

 

-. 정치 지도자일 때 명분과 이념으로 재미를 보았더라도 국가 지도자는 명분과 이념을 버리고 철저히 부국강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순수한 명분을 버리고 잡스러운 이익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영분은 구분의 정치력이고 이익은 통합의 토대다. 이념과 명분이 강조되는 한, 통합이라는 구호가 실제로는 또 하나의 배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 통치자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명분을 공유하던 정치 동지들과 달라져야 한다. 통치자로 변신하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심리적 결별이다. 그 사람은 고독하다.

 

-. 혼자 걸어야 했다. 모든 창의적 길은 혼자 걷는 길임을 그는 아직 몰랐다. 거기에 승리가 준비되어 있음도 알지 못했다. 

 

-. 선진국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 물지적인 풍요나 군사적인 힘이 철학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 철학은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는 순간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철학으로 생산되는 순간 비철학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비극적 운명으로 태어났다. 철학은 완성되는 순간 철학으로서의 생명을 상실한다.

 

-. 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어떤 학문이 그 활동성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적이 있는가. 오직 철학만이 '활동'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다. philosophy,즉 지성을 사랑하는 행위, 지성적 레벨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행위, 지성적 시선으로 세게를 응시하는 행위 자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타이어가 아니라 그냥 바람일 뿐이다. 이제 내용을 답습하는 일을 넘어 스스로 활동성을 발휘해야 한다. 자신만의 활동으로 세계와 접촉하려는 용기가 바로 창의성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전쟁의 목적이 평화에 있는 것처럼 모든 행위의 목적이 바로 여가를 갖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여가'는 단순한 휴식이나 이완을 제공하는 놀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때 '놀이'는 노동의 더 나은 생산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여가'는 인간 존재의 실현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가'는 존재론적 위상을 가진다. 

 

-. 직공에서 벗어나 관조로 나아가야 한다. 장자 역시 세계의 진실과 만나는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체계에 갇힌 자기를 '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302~303 이야기를 요약)

 

-. 여가적 활동을 하면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관조적 인간은 다시 주도적이고 능동적 인간으로 등장한다. 장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세게의 궁극처에 여가를 보내는 사람은 사물을 사물로 다룰 수 있지만, 사물에 의해서 사물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 장자, 산목(山木)

 

-. 여가의 활동, 놀이의 활동은 바로 인간을 기존의 체계를 벗어나서 어던 것으로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실재의 세계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다. 체계를 벗어난 인간은 '살해된 인간', '장례 치러진 인간'으로서 관조의 경험에 수동적으로 노출된 인간이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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