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상
밀도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텍스트가 많아서 읽는데 조금 버거웠다. 내가 생각했던 밀도보다는 짙었고, 밀도에 적응할만하면 (이제 조금 알겠다 싶으면)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아쉬웠다. 14명의 철학자를 다루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구성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책에 담는 철학자의 수가 10명 이내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철학과 여행이라는 컨셉에서 절대적으로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보니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었다. 소개된 여행 관련된 에피소드 역시 여행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여행지에서 겪은 일상과 대화에서 철학적 실마리를 찾는 사고흐름에 관한 것이었다. 몇몇 방문한 여행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도 하는데 아쉽게도 지도가 없어서 쉬이 머릿속에 그려볼 수 없었다.
여행 에세이에 대한 기대만 접어둔다면 재미있는 내용도 많고 저자의 글솜씨도 유쾌해서 몇 번 더 읽으면서 각 철학자들에 대해 깊게 공부해보고 싶다. 이 책을 시작으로 다른 철학서도 찾게 될 것 같다. 고로 이 책은 충분히 좋은 책이다.
○ 책에 대해
작가 에릭 와이너는 한국에서도 글을 재미있게 쓰기로 유명하다. 빌 브라이슨과 비슷하다는 평이 많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도 '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알랭드 보통의 통찰력'이 만났다고 소개한다.
○ 책 속에서
들어가는 말: 출발
-.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치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 역시 지혜는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는 것,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다.
-.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경험이다. 오로지 기차로 이동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광활함과 아늑함의 희귀한 조합(작가가 기차를 좋아하는 이유)
-. 철학은 쉽지 않다. 철학은 멋지지 않고 일시적이지 않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더 가깝다.
-.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
-. 철학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다. 철학은 지식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1부 새벽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 여행은 좋은 의미에서 나를 멈춰서게 한다. (<명상록> 中)
-. 실존주의적 판단은 늘 일시적이다. (카뮈에 대한 이야기 중)
-. 성가신 마땅히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다. (우리는 마땅히 침대에서 일어나야 한다)
-. 철학에서 명백한 것은 없다. 철학에는 늘 '하지만'이 있다.
-. 마르쿠스의 가장 큰 용기는 '타고난 비관주의를 억누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었다. (작가 프랭크 매클린의 말)
-. 의사 갈레고스는 마르쿠스가 잠들 수 있도록 데리아카(theriaca)라는 이름의 약을 처방했다.
-. 너는 오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그러는 대신 내일을 택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힘들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라. 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 해야만 한다."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 미친 지혜는 사람들을 뒤흔들어 깨달음을 주기 위해 사회규범을 내던지고 배척된 위험 또는 그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 소크라테스는 충격 요법의 원조다. 충격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미친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은 지혜롭기보다는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 있을 뿐이다. (그가 알았던 지식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식을 알게 된 방식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 질문은 의미를 구하고 또 전달한다. 때로는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질문을 무기로 사용한다. 상대를 저격하고 자신을 저격한다. 질문으로 변명을 삼고 나중에는 정당화한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문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이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발명하진 않았지만 질문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질문이 끌어내는 대답을 바꾸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덕분에 전과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무지에서 나온다. 만약 우리가 실수가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ex. 좋은 아빠란 무엇인가?)
-. 우리는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아니면 성찰한 적이 없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한다.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
-. 다른 사람을 짜증 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 (피터 크리프트)
-. 소크라테스는 정원사였다. 마음속에 당혹스러움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 다른 사람의 조롱을 내버려 둬라 비웃음은 지혜의 대가다.
-. 사람들은 가끔 기차 안에서 경험하듯이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뒤쪽으로 달리고 있고 그러다가 갑자기 진짜 방향을 깨닫게 된 것(<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 아테네 아고다역
3 루소처럼 걷는 법
-.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더 따분해진다. (존 저스킨)
-. 루소는 우리가 인간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 사회적 관심이라 말한다.
-.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루소도 마찬가지로 산책을 좋아했다.)
-. 철학자들은 걸었다. 홉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칸트. 루소는 하루에 30km 이상 걷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루소는 정신과 신체가 단절되어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거짓임을 잘 보여준다.
-. 니체 "철학보다 몸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
-. 분노는 몸에서도 존재한다. "감정들은 결코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분노한 사람의 신체 바깥에 있는 어떤 신성한 곳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 루소의 철학을 요약하면 "자연은 좋고, 사회는 나쁘다."
-. 마르쿠스 황제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유대교 안식일을 "시간 속의 성전"이라고 표현했다. 걷기는 움직임 속의 성전이자 휴대가능한 평온함이다.
△ 뇌샤텔 - 모티에(1762년부터 1765년까지 거주) - 루소박물관
4 소로처럼 보는 법
-. (*역자주) 암트랙에는 조용한 열차칸이 따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 소로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에서 인식론적 난제에 엮이길 거부했다. 신뢰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감각은 우리가 가진 전부인데, 최대한 잘 사용하면 되지 않나?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인 철학이었다.
-.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는 모든 철학은 궁금해하는데서 시작한다고 믿었다. 소로는 이 생각을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월든>에 나오는 짧은 구절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멋지다." 소로가 철학자보다는 경이로워하는 10대처럼 보인다는 점이 좋다. 어쩌면 둘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 소크라테스처럼 소로 역시 "두려움 없는 자기 점검"을 통해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
-.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손의 감각은 간헐적 요가 수행가였던 소로에겐 일종의 명상 같았다.
-. 소로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을 '마음검사'로 여겼다.
-.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베다>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란 '만족이 없는 욕망'이다. 에너지와 비슷한 개념인데, 이러한 의지는 금욕적인 삶과 예술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 의지는 자기 자신을 해친다. 결국 의지는 자기자신을 먹어치우며 살아가야 하는데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의지는 굶주려 있다.
-.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하지 않다.
-. 의지(욕망, 에너지)를 떨쳐내는 법은 금욕적인 생활(명상, 순결, 단식)과 예술이 있다. 예술은 의지라는 끊임없는 분투와 고통으로부터 일시적 유예를 제공한다.
-. "예술이 안개를 걷어낸다. 개별성이라는 환상이 사라지고 인식과 인식의 주체를 분리하지 못하고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된다. 의식 전체가 인식된 단 하나의 상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나 부처는 모두 고통의 근원을 분리감이라고 했다.)
* 분리감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
-.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그 대상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이상할 정도로 온전히 그 자체로서 기묘할 정도로 매우 현실적인,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 브라이언 매기 -
이런 미적 순간에는 고통도, 행복도 느끼지 않는다. 행복과 슬픔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다. 세상을 떨쳐내는 동시에 거짓 이분법도 떨쳐낸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대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맑은 세계의 눈'이라고 칭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순간을 인식하자마자 의지가 다시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고 마법은 끝이 난다.
-. 고슴도치의 딜레마(적당한 거리). 우리는 삶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 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 삶은 고통이지만 예술로 잠시 고통을 유예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플루트 연주를 즐겨했다.) 그는 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을 넘어 일종의 지식을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예술은 정념을 초월한다.)
-. 욕망을 키우는 모든 것은 고통을 키우고, 의지를 줄이는 모든 것은 고통을 완화한다.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는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포르노는 예술이 아니다. 포르노는 예술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쇼펜하우어의 미학의 위계질서상 건축은 아장 아래에 있고 그 위로 사다리가 놓여있으며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는 미술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이런 위계질서상의 예술과 조금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은 본질을 이야기한다.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다른 예술은 다만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다. 천국에 음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가 들은 음악은 우리가 입는 옷이나 우리가 모는 자동차, 우리가 마시는 와인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 (존 리스터 - 작가의 친구) "지식은 귀를 단련시킨다"
종류가 다르면 듣는 방법도 달라야 하나. 바그너의 음악은 마약의 효과가 밀려드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감각적이다. 베토벤, 말리, 브람스는 좀 더 까다롭다. 바그너는 무언가에 관해서 말을 하지만 베토벤이나 말리, 브람스는 그냥 말을 해서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존 리스터와는 다르게)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들을 때는 딴생각에 깊이 사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심 없는 괌점에서 음악을 경험) 여기서 사심이 없다는 것은 기대나 욕구가 없고 미학적 기쁨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놓는 것을 말한다. "아무 판단 없이 음악을 들을 때, 절대적 행복을 느낀다."
-.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감정에서 추출한 정수"라고 표현한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에 관한 슬픔이다.
-. 책은 자기 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책/인터넷으로 너무 쉽게 답을 찾는 것에 대한 비판 관점)
-.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는 거의 아무 가치가 없다. 반사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현대인들. 인터넷은 디지털 시대에 나타난 쇼펜하우어의 의지이다. 절대 만족하는 법이 없다.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제시하지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온다.
△ 프랑크푸르트 쇼펜하우어 기록보관소
2부 정오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 장소는 중요하다 장소는 생각의 보고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이다.
-.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
-.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이다.
-.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즉,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고통의 부재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라 평정주의자였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포도 한 접시(즐거움)를 주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 맨 위에 사소한 즐거움을 올려놓고는 왜 행복해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 자연은 반드시 필요한 욕망을 채우기 쉽게, 불필요한 욕망은 채우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사과는 나무에서 열리지만 테슬라는 나무에서 열리지 않는다.
-.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쾌락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더 증가할 수 없다. (환한데 더 밝아질 수 없듯이) 그저 다양해질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소비문화는 다양한 쾌락이 더 많은 쾌락을 의미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잘못된 동일시가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다. (더 많은 신발, 더 많은 옷)
-. 좋은 것을 즐기지만 그것을 일부러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태도(에피쿠로스)
-. 에피쿠로스는 부처와 유사하다. 둘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 쾌락은 잘 '점검'해야 한다. 어떤 것은 고통으로 이어지는 쾌락이 있고, 어떤 것은 그 반대에 있다. (운동/흡연)
-. 고통 없는 순수한 쾌락은 드물다.
-.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커다란 쾌락 중 하나로 보았다.
-. (톰 머를과의 일화) "투벅척은 2달러짜리 싼 와인이지만, 대화를 나누며 마시기 '충분히 좋은' 와인이다. 마시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에 35달러 이상 쓰는 것은 불필요하다."(그는 카페를 추천해 달라는 저자의 질문에 가까운 스타벅스를 알려주었다.")
-. 충분히 좋다. 다른 말로는 완벽하다.
-. 충분한 것으로도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다.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시몬 베유 부분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 철학은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철학은 이의를 제기한다. 요구한다. 가장 훌륭한 철학자는 가장 요구가 많은 철학자다.
-.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일 때 찾아온다."
* 몰입 by. 칙센트미하이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진정한 뜻은 나는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나는 의심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모든 부주의는 이기심의 한 형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부주의하다.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다"
-. "내 괴로움의 뿌리에 있는 것은 결과가 아닌 나의 욕망이다."
9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것이다.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 가족은 우리가 인仁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친절이라는 근육을 키울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한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면 모든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 친절은 힘든 것이다. 친절에는 감정이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교의례가 필요하다. 결혼과 졸업, 죽음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의식을 치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너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이례는 우리를 하나로 모아준다. 의례는 우리의 감정을 담을 그릇을 제공한다. 친절은 힘든 것이다.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10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집중이 잘 되지 않은 부분)
-. "목록은 문화의 기원이다." - 움베르트 에코 -
-. 목록은 가치를 인식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좋은 목록은 범주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다양한 항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충분히 커야 하지만, 생각을 잘 감쌀 수 있을 만큼 작아야 한다. (저자)
3부 황혼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 영원회기. 정말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영원히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나에게 다시 나를 상기시킨다.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 바깥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진정한 자신은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그게 어디든 당신이 평소 '나'라고 여기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더라도 인생을 사랑할 수 있나? '다 카포'라고 외치며 다시 한번 춤출 수 있는가?
* 영화 <어바웃 타임>이 연상되는 부분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본인에게 달렸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스토아 학파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생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템이 되지 않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는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스토아적 태도가 결과를 바꾸진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는 방식을 바꾸어 준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고통을 더하지 않는다. )
-.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맡기지 마라.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 자유로울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 별역잡아함경이 생각난 구절
-.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에픽테토스)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 궤적은 더 이상 궁수이 손에 달려있지 않다." (키케로)
-.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바라지 말 것
* 내가 지금 가져야 할 마음태도
-.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스토아 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감정과 판단이 실제 경험과 다를 수 있다.
-. 외부 사건(인상) -> 반사반응(前감정 혹은 최초 정념이라고 말함) -> 우리가 동의할 때 반사반응이 '감정'이 된다.
최초정념을 존중하고 증폭시키기로 했을 때, 우리는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상에서 동의로 가는 끈을 잘라 내야 한다.
-. 최초정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동의하라. 고독은 평온함이라 불러라. 붐비면 축제라 이름 붙여라. (정신승리 같은 것이지만 도움이 된다.) 고통이 날 것의 감각에서, 반사적 반응에서 그치도록 해라. 본격적인 감정으로 발달하지 않도록 하라. 고통에 마음을 쓰지 말아라.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거나 증폭시키지 않도록 하라.
*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 자발적 박탈. 기쁨을 주는 것에 덜 얽매이게 된다. 용기를 길러준다. 미래의 고통을 줄여준다. (예방주사)
막연하게 걱정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예상해라. (미래의 고통을 경감시켜 준다.)
불안은 다가올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지나가다 잠시 머무르는 사람일 뿐이다.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르는 것임을 믿는 것
-. 나이는 그 무엇의 원인도 아니다. - 철학자 얀 바스 -
-. 크로노스 chronos. 일반적인 시간 / 카이로스 kairos 적절할 때, 무르익는 기회
-. 실존주의자들은 질문의 답이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신이나 인간의 본성에 있지 않다. 하나의 인간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기 다양한 특성이 있을 뿐이다. 보부아르는 본성이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말했다.
-.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았다." -사르트르-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데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자기 불행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져야 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면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스스로를 찾지 마라. 스스로를 그려 나가라.
-. facticity(사실성 - 실존주의 용어). 사실성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삶의 요소를 의미한다. 우리는 사실성을 통제할 수 없지만 사실성을 초월할 수 있고 자신의 사실성, 즉 자기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단이나 배심원이 없다면 판결도 없다. 무인도의 사람은 생물학적 노쇠를 경험하겠지만 나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 진정성authenticity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anthentes(아우텐테스)에서 나왔다.
-. <잘 늙는 법> *글쓴이가 보부아르의 사상에 비추어 생각한 것
(1)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과거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풍성한 과거는 생기 있는 현재를 만든다. 단, 기억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까먹을 필요가 있는 부분도 있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끄집어낼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회상의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는 있지만 죄책감이나 후회에 대한 단어는 없다고 한다.)
지나친 회상은 좋지 않다. 과거의 자신에게 얽매여 영원히 과거의 모습으로 남고자 하면 이런 종류의 과거는 얼어붙은 과거이고 얼어붙은 과거는 죽은 과거이다.
'만약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흘려보내라.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태도를 가져라. (니체의 '다카포'처럼)
(2) 친구를 사귈 것
우정은 행복의 가장 큰 원천 중 하나다. 친구는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연결시켜 준다. 나이가 들었을 때 친구를 잃는 것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함께 과거의 일부까지 잃어버린다.
보부아르와 실비의 우정 -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지는 않지만 너 덕분에, 너를 통해서 살아.
(3) 타인의 생각에 신경 쓰지 말 것
타인의 칭찬을 갈구하지 마라. 타인의 칭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스스로 작업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넘어설 수 있다. 이것이 지적 해방이다.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모네.
(4) 호기심을 잃지 말 것
노년은 호기심, 경이로움을 되찾는 시기다.
여행 - 다른 국가에서 보내는 이틀은 익숙한 곳에서 보내는 30일과 같다. (프랑스 시인 외진 이오네스코)
보부아르는 여행길에서 평화를 느꼈다. "나는 영원을 품는 순간에 산다. 나 자신의 존재도 잊어버린다."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노년에는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열정은 반드시 외부로 표출되어야 한다. 소일거리가 아니라 프로젝트를 가져라. 프로젝트는 의미를 제공해 준다.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 개인과 집단에 대의명분과 사회적, 정치적, 지적, 창의적 작업에 헌신하는 것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20대보다 70대에 정치적으로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6) 습관의 시인이 될 것
습관은 그릇이나 가방 같은 것이다. 우리 삶의 조각들을 들고 다닐 수 있게 해 준다. 보부아르는 습관을 지배했다. 하루가 언제나 비슷해 보였지만 삶은 전혀 침체되지 않았다. 매일 글을 쓰고 음악을 들었으나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음악을 듣지는 않았다.
(7) 아무것도 하지 말기
수용. 게으름을 피우기 위한 카이로스도 중요하다.
(8) 부조리를 받아들일 것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가 이룬 모든 성취는 시간의 가차 없는 발길질에 허물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시시포스의 과제,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참담한 운명을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9)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놓는 법도 배워야 한다. 덜 불안해하고 덜 걱정해라. 덜 사적인 것으로 관심사를 확장하여 자아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삶이 좀 더 보편적인 삶에 어울리도록 하라.
강의 폭은 넓어지고 둑은 낮아진다. 갈수록 잔잔히 흐른다. 커다란 바다와 어우러지고 고통 없이 독자성을 내려놓는다. 물러나는 때도 가이로스가 있다.
(1)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우리의 미래가 줄어들수록 다른 이의 미래는 더욱 커진다. 보부아르는 "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다. 그들의 계획 안에서 내 계획을 발견하면 내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에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니듯"
-. 몽테뉴는 assay(불어로 '해보다')라는 문학형식을 만들었다.
몽테뉴에게 에세이란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시도였다.
-.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 그러나 몽테뉴는 죽음을 동경하지 않고 삶을 동경한다. 다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러한 삶에 대한 동경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자 우리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치면 자기 자신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 죽음과 절망 모두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만이 답이다.
(예) 몽테뉴는 종종 나태한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질책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지를 깨달았다.
-.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축제가 한창일 때 해골을 가져다 보여주었다.
*메멘토 모리가 생각난 구절
<나오는 말>
-. 익숙함은 경멸을 낳지 않는다. 마비를 낳는다. 가까이 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고향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 인식은 선택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저자가 쓴 휴대폰 액정에 대한 이야기는 가볍게 읽기 좋지만 울림이 있다. (휴대폰 액정이 깨졌다는 그 사실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현대인들. 과연 그것이 정말 우리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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