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들/독서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Varsika 2024. 4. 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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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평

<쇼코의 미소>보는 조금 농도가 낮은 책이었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아치디에서>가 좋았다. 다만 좋았던 이야기도 최은영 작가의 다른 소설보다는 한계가 명확한 느낌이었고, 그다지 좋지 않았던 이야기 역시 한계가 느껴졌다.

 

이야기에 대한 만족도와 별개로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서른살이 넘은 화자들이 가깝게는 대학교 시절, 멀게는 유년시절을 돌아보며 지나간 인연에 대해 다시 발굴하고 사유하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참 많이 공감되고,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한 이야기 방식 자체가 나에겐 위로 같았다. 나 홀로 간직은 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상대가 사라져버려 나눌 수 없는 감정들. 관계가 좋을 때도 선명하고, 싫을 때도 선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나서 보니 모호하지 않았던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책에 대한 다른 이들의 감상과 리뷰를 읽고나니, 나보다 충만하게 느낀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훗날 다시 읽어보면서 그런 감상을 느끼고 싶어 우선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 제목에 대해서

최은영 작가는 나에게 무해한 사람은 없다. 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 말인 즉슨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무해할 수 없는, 유해한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의도와 다르게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유해할 수 밖에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나는 무해한 사람이 아니고, 저 사람 역시 무해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라도 무해의 순간들을 늘려갈 수 있지 않을까. 

 

 

○ 이야기들

 

1. 그 여름

 

- 배려라니. 지금의 이경은 생각한다. 배려라니 그 거짓말은 수이를 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이경은 몰랐다. 수이는 그런 식의 싸구려 거짓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사실도. 

 

▷ 이경이 수이와 사귀는 와중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와 수이에게 이별을 고하려는 장면이다. 이경은 이기적이게도 '수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비밀로 한 채 헤어지려고 한다. 단지 상황이 변하고 마음이 식었다는 말로 이별을 고한다. 그것이 수이가 덜 상처받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런 정당화의 장면이 고스란히 글로 나타나는 데에서 그쳤다면 익숙한 씁쓸함에서 끝났을 것인데, 최은영 작가는 그것이 '싸구려 거짓'이라고 명명해주었다. 그렇다. 그것은 싸구려 거짓이다. 씁슬함 끝에 약간의 홀가분함이 생겼다. 

 

-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다.

 

 

2. 601, 602

 

(1) 한 줄 평: 나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자기연민인가.

 

(2) 책 속에서 

 

- 생일에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좋은 노래를 녹음한 믹스 테이프와 효진이가 좋아하던 꿈틀이 젤리를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교류는 애초에 오래갈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따. 얼굴과 몸이 변하고 키가 자라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변해서 고작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일 년 전의 일이 아주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의 편지는 중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끊어졌다. 

 

▷ 물리적 거리가 떨어진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은 초기의 즐거움. 그런 즐거움은 마치 책을 살 때와 비슷하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감정을 주기도 한다. 좋은 행동을 이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멀리 연락을 던지는 것에는 그런 감정이 깔려있다. 연락이 끊길 때 아쉬움과 함께 약간의 죄책감이 드는 것은 그 탓일 것이다. 

 

 

3. 지나가는 밤

 

-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97)

-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9)

 

 

4. 모래로 지은 집

 

(1) 내용 

화자는 나비(본명: 선미)이고 공무(현우, 男), 모래(은아, 女)과의 우정과 그 상실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은 내내 닉네임으로만 불리다가 현실에 부딪혀 위기가 닥칠 때에만 본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화자 나비가 35살의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고등학교 시절과 20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이야기를 다룬다. 

 

나비와 공무는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왔고 그로 인하여 유복한 모래에 대해 조금은 삐뚤어진 시선을 갖고 있다. 모래 특유의 천진난만함이나 우유부단함, 그리고 너그러운 모습마저도 유복한 환경에서 나온 감정의 사치라고 생각한다. 조금씩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할 무렵 공무는 군입대를 하게 되고, 사회에 남겨진 나비와 모래는 계속 엇박자를 탄다. 결국 공무가 군대를 제대할 무렵 모래는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미국으로 떠난다. 

 

모래가 떠나고 나서야 나비는 모래의 칭얼거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있는 고백이었음을, 그녀의 한탄이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과 공무에 대한 신뢰였음. 그리고 피곤하다고만 느꼈던 모래와의 관계에서 자신 역시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소속감과 따뜻함을 느껴왔음을 깨닫게 된다. 모래의 연락과 노력으로 이어진 그 관계는 그들에게는 다름아닌 가족이었다. 그래서 이 단편의 제목 역시 모래로 지은 '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2) 책 속에서 

-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 왜 병든 사람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 

 

- 왜 이해해야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고등학생 공무는 천리안 동호회에 그렇게 썼었다. 그 문장은 며칠이고 내 안에서 구르면서 마음에 상처를 냈다. 나는 늘 이해하려는 사람이었으니까.

 

-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 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 스물하나의 나에게 이 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십 분의 일이었고,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시간과도 같은 양이었다. 나의 선택으로 공부를 만났고, 일상을 나눴고, 내 마음이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 그애에게 전했으니 공무는 나의 일부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와 떨어져 있는 나는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의 애착이 스물하나의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 모래가 말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그저 예전의 뫙이었다는 기분이."

"모래야"

"그저 예전의 우리를 흉내내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열심히. 공무도 알았겠지"

 

- 응달 벤치에 앉은 그애의 얼굴은 고요했다. 나이를 먹고 힘이 들어 그런 표정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 같앗다. 한숨에 젊음을 빼앗긴 사람처럼, 그래서 어떤 기대도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로 공무는 나를 봤다.

 

- 다리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들과 함께.

 

 

5. 고백

 

(1) 내용

 

여고생 3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친구 진희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미주와 주나에게 고백하였다. 주나는 역겹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고 미주는 놀란 상태로 진희를 위로 한다. 진희는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자살한다. 진희는 거친 말을 내뱉은 주나로 인하여 진희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몇 년이 지나 미주와 주나는 마주하는데, 주나는 진희가 레즈비언임을 고백하던 그날 미주의 표정을 지적한다. 마치 못볼 것을 본 것마냥 냉담했던 그 표정으로 진희가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때까지 진희의 죽음은 오로지 주나의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미주는 크게 놀라고, 반발하지만 일정부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로소 진희가 주나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아무런 말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2) 책 속에서 

 

- 충격이 지나가고 나서 슬픔이 밀려왔다. 미주는 자신이 진희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이런 차가운 방식으로 네가 나를 버리다니, 나를 떠나다니. 아무 말도 없이, 유서 한 줄도 없이, 쓰고 또 써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을 주다니. 나에게 너의 유서를 쓰게하는 벌을 주다니. 가지 말라고, 한 번 붙잡을 기회조차 주니 않았다니.

 

-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 그러나 진희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은 없었다. '우리'라는 말에는 늘 진희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미주와 주나가 함께했던 시간은 없던 일이 됐다. 

 

 

6. 손길

 

-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7. 아치디에서

 

(1) 내용

공간이 달라지면 감정은 남아도 인연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2) 책 속에서 

- 난 그냥. 너에게, 있잔항,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엇어. 이상하게 그 말이 잘 안 나와서. 말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그랬던건데. 랄도, 늦었지만, 너에게 고마워. 

 

▷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다시 이사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지만. 전입한 주에 전기요금이며 가스요금까지 자잘한 것들을 정리하고 자동이체 신청을 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가스 업체에서 본인 확인차 전화를 했다. 그때 나는 식당 앞 대기줄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 점심시간이었다.

 

자동이체 등록이 끝나고 상담원은 대화의 말미에 "새로 이사한 곳에서 행복한 일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정말 힘든 일이 많았다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러지 못했고, 멍해진 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정신으로 감사하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는 그 순간부터 2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 그 순간에 제대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간단한 고마움조차 표현하지 못했을까. <아치디에서>에 나오는 저 표현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마음에 비해 말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고 그탓에 영영 내 마음을 전할 길도 잃어버렸다. 이 글을 빌어 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주었던 상담사께 너무 감사하다고, 이사온 뒤에 일어난 모든 행복한 일은 그대의 축복 같은 인사말 덕분이었다고 전하고 싶다. 

 

- 그때도 여전히 시간만 잡으면 아일랜드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팔 년 동안, 나는 아일랜드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출국장을 나서면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했던 건 착각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아일랜드는 내 마음속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려 현실의 선택지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3) 기타

- 아치디라는 도시는 없는 것 같다. 더블린 근교에 아치디커네리(Archdeaconary)라는 도시는 있다. 차로 한 시간 거리다. 

 

 

※ 해설, 끝내 울음을 참는 자의 윤리

 

- 감정을 짧은 호흡의 재치 있는 문구나 감각적인 사진으로 압축하고 대체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회 속에서 이 시대가 망각해가는 감정의 결을 섬세한 손으로 발굴해내는 최은영이란 존재가 어벗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되새기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관계에 소리 없는 파열음을 남긴 서늘한 기억을 응축시켜 보여주는 방식은 최은영의 소설이 관계 소겡서 지향하는 윤리를 투명하게 지시한다.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누군가를 배반하고 그에게 상처 주었던 순간을 끝내 잊지 않겠다는 의연함은 이번 소설집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 자신이 느끼는안도와 행복의 풍경이 언제나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ㅇ르 철저히 밀봉했을 때에야 가능하 ㄴ것임을 선연하게 의식하는 예민한 윤리, 이 서늘한 거리 감각이란 최은영 소설의 요체이자 매력이다. 이것에 대해 알고 나며 ㄴ왜 인물드이 쉽게 눈물을 흘리는 대신, 끝내 울음을 참아내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눈물도결국에는 자신으루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나르시시즘에 댛한 날 선 경계가 여기에 있다. (<고백>에 대한 해설 中)

 

 

* 다른 이들의 리뷰

 

- 따뜻한 시선을 놓칠 떄,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떠난다고 생각하고 떠난 게 아니었는데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가 보았을 땐 어느 것 하나 그 시절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크리스천 투데이)

 

- <쇼코의 미소>가 세대를 넘나드는 종축의 사랑이었다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동등한 관계간, 횡축의 사랑에 대해 논한 것 같다. (어느 네이버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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