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강의 리뷰

[벌거벗은 세계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서강대 박현도 교수)

Varsika 2022. 6. 1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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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유로메나 연구소 박현도 교수


* 본 포스팅은 <벌거벗은 세계사> 3월 22일 방송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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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성묘 교회

유대인 입장에서는 유대교 성전이 있었던 곳이며, 기독교인에서는 구원자인 예수님의 무덤(성묘 교회, Basilica of the Holy Sepulchre)이 있던 곳이다. 무슬림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하여 신(알라)를 만난 이야기가 전승되는 신성한 장소다. 세 종교의 성지이지만 지금의 갈등은 종교 분쟁이 아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하 이-팔) 분쟁은 영토분쟁이라 보는 것이 맞다.

유대인의 역사


유대인이 스스로의 조상이라 생각하는 아브라함은 본라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쿠웨이트) 지방에 살았다. 이후 신의 계시에 따라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이 살던 시기 가나안에는 큰 흉년이 들고, 야곱은 유대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향한다.


이후 유대민족의 번영을 견제한 이집트 왕정에 의해 400년간 노예생활을 한다.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으나, 이때는 이미 블레셋인(현재의 팔레스타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때부터 가나안의 땅을 두고 블레셋인과 유대민족은 싸우게 된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을 장악하지 못했고,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땅을 정복하게 된다.

삼손과 데릴라


▷ 유대인 다윗에게 패배한 거인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 장군이다. 삼손을 꾀어낸 데릴라 역시 블레셋인이었다. 블레셋인의 고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그리스 크레타섬으로 추정되는 Caphtor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 인류역사과학 연구소는 고고유전학 분석을 통해 블레셋인이 기원전 12세기 무렵 남부 유럽에서 레반트(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로 이주해왔다는 결과를 2019년 발표했다. 이들이 블레셋인의 유골을 분석한 아슈켈론은 이스라엘 남부 항구도시로 텔아비브에서 약 50km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추가 끝)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리된 시점의 영역


기원전 1천년 경 사울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국하고 초대 왕에 오른다. (이스라엘 왕국 건국) 이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천도한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유대교 성전을 건설한다. 솔로몬 사후 유대 왕국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남유다 왕국으로 쪼개진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지금의 시리아)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 왕국에 멸망당해 포로가 된다. 후에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자 노예에서 해방된다. 기원전 63년에는 다시 로마가 가나안을 점령한다. (페르시아 황제의 유대인 해방)

로마가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 유대인은 두 차례에 걸쳐 독립전쟁을 치룬다. 1차 독립 전쟁(66년 ~ 70년)에서 패배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한다. 이때 로마는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유대교 성전을 파괴하고 성벽도 서쪽 일부만 남겨놓고는 모두 부숴버린다. 이때 남겨진 서쪽 성벽이 아직도 전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2차 독립전쟁(132년~135년) 때에도 유대민족은 로마에 패배한다. 이때 로마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아일리아-카피톨리나(Aeilia Capitaolina)로 바꿔버린다. 유대주라는 지역의 명칭 또한 시리아-팔라이스티나주로 변경한다. 이후에 이 땅은 줄곧 로마의 땅이었다.

이후 7세기에는 아랍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는 1917년까지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유대인들은 긴 유랑생활(디아스포라)을 겪게 된다.

▷ 디아스포라(Diaspora) :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로 특정 민족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뜻한다.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유대 왕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각각 멸망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간 바빌론 유수(幽囚)로부터 시작된다. (추가 끝)

지역에 따라 이주한 유대인들을 달리부르는데 세르파딤(이베리아 반도), 아슈케나짐(유럽, 특히 동유럽) 등이 그것이다. 유럽으로 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유대민족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민족들은 예수를 구원자가 아닌 예언자로 받아들였으며 신성모독죄를 적용하기도 했다.

tight fisted

또 기독교에서는 대부업(이자놀이)를 교리상 금지하고 있었으나 유대인들이 금융업으로 큰 돈을 벌자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길드에도 가입할 수 없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고리대금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영어로 'tight fisted'라는 표현이 쓰곤 하는데 이는 돈에 대해 악착같았던 유대인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결국 유럽 지역의 박해를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대거 이주한다. 19세기 말에는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이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대학살이 일어난다. 러시아 혁명기였던 1881년, 황제인 알렉산드로스2세가 혁명 세력에 암살당한다. 이후 유대인들이 황제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1880년대부터 40년간 대학살이 일어나 유대인 15만 명이 사망한다. 이를 포그롬(Pogroms, 대 박해 - 본래 아수라장에 분노를 퍼붓다는 러시아말)이라고 한다.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 모함으로 인해 10년간 수형생활을 겪는다.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차별 사건이 일어난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 그것이다. 프랑스군 장교였던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려 중형을 선고 받는다. 그는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이것은 당시 프랑스의 최고형이었다. 그가 간첩으로 몰린 이유는 단지 피의자와 필적이 유사하다는 것뿐이었다. 이후 반유대인 시위가 프랑스를 뒤덮는다.


이스라엘 건국의 움직임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 그는 이스라엘 건국을 보지 못하고 일찍 사망한다.

이 사건을 취재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기자 헤르츨은 충격에 빠진다. 프랑스처럼 계몽된 국가에서조차 유대인 차별이 일어난다면 유럽 그 어디에서도 유대인은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긴다. 1896년 <유대국가>라는 책을 집필해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도 제기되었던 나탄 비른바움의 시온주의를 다시 주창한 것이다.

1897년에는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자 총회를 열었고, 유대국가의 국기와 애국가를 만들고 건국을 선포한다. 유대인들은 그를 현대판 모세라고 불렀다. 그는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함께 조사하였는데 조사를 다녀온 이들이 "신부는 아름다우나 이미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다."라는 말을 전한다. 가나안의 땅은 그대로지만 이미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후 1901년에 유대민족기금을 만들어 전 세계 유대인들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가나안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하고 정착촌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이주시킨다. 당시에는 주로 텔아비브와 인근의 땅을 사들였다. 텔아비브는 히브리어로 '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이중계약

 

메카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하심 가문)과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골몰한다. 당시 메카 지역을 다스리던 아랍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의 헨리 맥마흔에게 편지를 보낸다.(1915~1916년) 이를 후세인-맥마흔 서한이라 부른다. 총 10차례 서한을 주고받았다. 샤리프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해 아랍 민족국가를 세워준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영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싸우기로 한다. 1915년부터 본격적인 항쟁을 시작한다. 1916년에는 지금의 팔레스타인 쪽에서도 반 오스만 항쟁이 시작된다.

 

 

1914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니, 요르단과 아라비아 반도 해안가를 갖고있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고전하던 영국은 이중계약을 체결한다. 프랑스와 몰래 오스만 투르크 영토의 분할안을 합의한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16년의 일이었다. 이를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이때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을 통치할 총 책임자(고등판무관)으로 유대인 시온주의자를 임명한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협상 기간은 후세인-맥마흔 서신 교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영국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유대인들의 건국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다. 1917년 당시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는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편지를 쓴다. 편지에는 시온주의자들의 염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이 담겨있었다. 결국 아랍인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친애하는 로스차일드 경(유대인 재벌 가문)

시온주의자들의 염원에 공감하는 다음 지지 선언문이 내각에 제출되어 승인받았다는 사실을 당신꼐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국왕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조국을 수립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벨푸어(당시 영국 외무장관) -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카이로에 있던 군사고문관을 중동에 파견한다.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는 당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추가 끝)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 영국 제50대 총리 아서 밸푸어 /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

 

종전과 배신


전쟁 이후 1920년, 사이크스-피코 협정대로 국경선이 조정된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고등판무관으로 유대인 시온주의자인 헐버트를 임명한다. 영국이 아랍을 버린 것이다. 당시 유대인은 약 1만 3천 명 정도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전체 팔레스타인 인구의 3%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후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유대인 유입이 일어난다. 1930년대 후반에는 유대인 인구가 약 40만 명으로 늘어나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한다. 특히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유럽 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된다.

 

영국 위임통치령(1920-1948) 시기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 영국령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 헐버트 사무엘(1920.7.1 임명)

 

아랍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결국 1936년, 급증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위가 시작된다. 본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단지 그곳에 거주하는 아랍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항쟁은 3년이나 계속된다. 영국과 유대인들의 탄압 속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싹트게 된 것이다. 반란은 영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3년이 넘도록 지속된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유대인 이민금지를 요구했다. 영국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10년 안에 팔레스타인 독립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반발했다. 1946년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킹 데이비드 호텔이 테러를 당한다. 이곳에는 영국의 총독부(행정본부) 및 헌병사령부(군사 본부)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테러로 6개 층이 붕괴하고 91명이 사망한다.

The bombing of The King David Hotel, July 1946

▷ 영국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제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랍인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킹 데이비드 호텔 테러는 유대계 과격단체인 이르군 쯔바이 레우미(Irgun Tsvai-Leumi)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테러를 지도한 메나헴 베긴은 훗날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다. 베긴은 이르군 활동 당시 아일랜드와 인도의 사례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역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유대민족이 차지할 땅을 가리킨다.(추가 끝)

 

미국의 등장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로 난감해하던 시기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유대인의 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유대인 유권자(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고 싶어했다. 정치적 실익을 생각한 것이다. 당시 이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실소유주는 유대인이었다. 영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던져버리고 자신은 빠져나간다.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안 /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열린다. 팔레스타인 영토분할안은 찬성 33표, 반대 13표, 기권10표로 통과된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팔레스타인 영토의 94%를 갖고 있던 팔레스타인 민족은 그 영토가 50% 수준으로 축소된다.

 

팔레스타인은 애초에 영토분할안은 거부해버렸는데, 결과적으로는 분할안이 다수결로 통과되어 버렸고, 팔레스타인의 주장의 관철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다. 당시에만 해도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는 시리아 민족주의의 한 부분으로 여겨질 정도로 응집력이 약한 상태였다.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영국은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서 철군한다.

같은 날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바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한다. 소련 역시 빠르게 이스라엘을 승인한다. 당시 소련 내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 가장 강력한 두 국가의 승인을 순식간에 받은 것이다. 이때는 수도가 텔아비브였다. 예루살렘은 유엔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남았다.

중동전쟁의 서막

 

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 (1948년 5월 15일 ~ 1949년 5월 10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자마자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선전 포고한다. 오랜 세월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리더 역할을 했었다. 실제로 아랍 연맹의 본부가 지금도 이집트 카이로에 있다. 이집트를 선두로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5개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모두가 팔레스타인 민족의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속내는 모두 땅을 차지하고 싶었다. 다만 그전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이 있었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아랍 연합군은 준비되지 않은 군대였다. 연합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이들을 지휘할 총사령관 자체가 없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민병대 시절부터 실전 경험을 쌓아온 하가나가 정규군으로 편입된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도 있었다. 3만의 이스라엘 정규군이 2만의 아랍 연합군을 쉽게 제압한다. 1948년 팔레스타인 분할안 당시 전체 팔레스타인의 56%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영토는 전쟁 이후 78%까지 늘어난다. 남은 22%는 요르단(서안지구)과 이집트(가자지구)가 차지한다.

이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이 70만 명이나 발생한다. 이들은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아직도 아직도 집 열쇠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아랍 세계에서는 이전 쟁을 안나크바(대재난)이라고 부른다.1차 중동전쟁 때부터 난민촌으로 쫓겨난 이들이 벌써 70년째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 하가나 : 1900년대 제2차 아리야(알리야라고도 하며 '하느님께 올라가다, 성전으로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시온주의 사상의 근본 교리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의 영향으로 1907년 결성된 유대인 자경단이다. 20세기 폭증하는 유대인 인구에 대해 아랍인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에 유대인 정착촌을 보호하고자 결성되었다. 총리를 역임한 이츠하크 라빈, 불도저로 불리는 우파 아리엘 샤론 총리 역시 하가나 출신이다. 하가나는 농약 살포를 명분으로 경비행기를 구입하여 비행사를 양성하였고, 이것이 현대 이스라엘 공군의 시작이 된다. 하가나 외에도 1920~30년대 팔레스타인에는 이르군(Irugun), 레히(Lehi) 등 유대인 군사조직이 활동했다. (추가 끝)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1956년 10월 29일 ~ 1957년 3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1918-1970)

▷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취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그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분을 갖고 실질 소유)를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하여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한다. 영-프 연합군은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여 거의 전멸시킨다. 그러나 미국이 이를 비판하며 엄정중립을 선언하였다. 소련은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영프이 연합군은 전투에 승리하고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화 국유화가 인정되었다. (추가 끝)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1967년 6월 5일)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가자지구,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다.


▷ 이스라엘과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이집트가 갑작스럽게 시나이 반도에 주둔한 유엔군을 몰아내고 타란 해협을 봉쇄했다. 이어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금지시키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하여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스라엘 국토방위의 중요한 개념인 '예방전쟁'이 이때에도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후 2시간 내에 이집트 공군을 분쇄할 작전을 세웠고, 이집트와 제3국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지중해 해상 50m에서 저공비행을 했다. 이들은 국경이 아닌 지중해로 우회 기동 하여 이집트 영공으로 진입했다. 이집트는 당시 소련제 신예 전투기를 보유한 아랍 최대 규모의 공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6일전쟁 당시 기갑사단장이었던 이스라엘 탈, 기갑부대 지휘관 시절의 아리엘 샤론, 아브라함 요페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을 무력화시킨 다음 전차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반도를 3일 만에 완전히 장악했다. 이스라엘 탈, 아리엘 샤론, 아브라함 요페 등 3명의 지휘관이 큰 공을 세웠다.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까지 이르자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항복했다. 서안지구에서 패퇴한 요르단은 이미 그 전날 항복했고 골란 고원을 빼앗긴 시리아도 UN의 휴전안에 동의했다. (추가 끝)

The Khartoum Conference(1967)

 

1967년 9월 1일, 아랍 연맹 정상회담에서 카르툼(하르툼) 결의가 발표된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3무 원칙이 천명된다. 무평화, 무협상, 무인정(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 카르툼 결의가 발표된 이후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절차에 착수한다. 이후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수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지전이 계속된다. 국지전은 1970년 8월 휴전 협정을 타결로 끝을 맺으나 양측 모두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를 풀지 않았다. (추가 끝)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1973)과 석유파동

안와르 사다트(1918-1981, 대통령 재임 1970-1981)


이집트에선 나세르 대통령 사망 이후 사다트 대통령이 정권을 잡는다. 그는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되찾고자 1973년 4차 중동 전쟁을 일으킨다. 사다트 대통령은 사전에 아랍 산유국들과 협의하여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나라에는 석유를 팔지 않도록 조치를 내린다. 결국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압력을 느끼고 미국의 중재 끝에 전쟁은 19일 만에 종전된다.

▷ 사다트 대통령은 1972년 이집트 내 소련 군사고문단을 추방시켰다. 후에 이것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기만전술임이 밝혀졌다. 실제로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여전히 이집트 내에 남아 있었다. 1973년 10월 6일, 유대인 속죄일인 욤 키푸르의 날(유대력 새해 열흘째 날)에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로 이스라엘 공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은 아리엘 샤론을 필두로 기갑사단을 수에즈 운하 너머 카이로로 진격시켰다. 이스라엘의 필사적인 반격과 미국의 중재로 19일간의 전쟁이 끝났다. (추가 끝)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년)과 사다트 대통령의 죽음

Camp David Accords


▷ 미국 카터 대통령(1977~1981년 재임)은 중동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7년 2월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하였으며 그해 4월 중동평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사다트 대통령은 다음날인 11월 20일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에서 아랍어로 연설했다. 이스라엘 국회에서 처음으로 연설한 아랍 지도자였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외면하는 정치적 구호는 전 세계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978년 2월과 3월에는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를 워싱턴으로 각각 초청해 평화교섭을 시작했다. 마침에 1978년 9월 17일,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이 공로로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 1979년 3월 26일, 중동평화조약이 워싱턴 백악관 뜰에서 조인된다. 두 나라의 국교도 같은 해 정상화되었다. (추가 끝)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 메나헴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평화협상에 들어간다.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12일간의 협상 끝에 협정을 맺고 백악관에서 조인했다. 그러나 사다트 대통령은 1981년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군인들에 의해 총에 난사당해 죽는다. 제4차 중동전쟁 승전기념 퍼레이드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인티파다

 

뮌헨 올림픽 참사 당시 사진, 테러범 중 하나인 칼리드 자와드(Khalid Jawad).

 

팔레스타인은 1964년 아랍 연맹의 후원으로 PLO를 조직한다. 1972년, PLO에서 갈라져 나온 과격 무장단체인 검은 9월단이 뮌헨 테러(뮌헨 올림픽 참사)를 일으킨다. 당시 PLO는 레바논에 있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폭격해 베이루트를 박살 내버린다. 결국 PLO는 레바논을 떠나야만 했다.

 

 


1987년,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규모 민중봉기인 제1차 인티파다(Intifada)가 일어난다. (인티파다의 영향으로 하마스가 생긴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에 살던 2백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와 정착촌이 급증한다.

이러한 중동 정세를 이용한 사례도 있다. 1991년 걸프전이 일어나고 위기에 처한 사담 후세인은 뜬금없이 이스라엘로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다. 이스라엘이 대응할 경우 아랍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쿠웨이트에서 철군하라는 연합군 측의 요구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이 철수하면 이라크군도 물러나겠다고 응수한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건국이래 처음으로 도시에 미사일이 떨어진 사건이었다. 이라크가 예고 없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지 않았다. 만약 이때 이스라엘이 반격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이라크가 원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이후 오슬로 협정(1995년)이 진행되고 8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팔레스타인은 테러와 폭력을 포기하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에게 영토를 제공한다는 대원칙을 만들어 낸다. 이 협정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탄생했다. 서안지구(웨스트 뱅크)는 팔레스타인 관리, 이스라엘 관리, 공동관리 등 총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에는 지금도 문제가 되는 정착촌 문제가 빠져있는 결함이 있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쪽의 극단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결국 오슬로 협정을 추진한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극우파에게 암살당한다. (1995년) 이후 강경파인 네타냐후(1996-1999, 2009-2021 재임)가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되고 오슬로 협정을 무효화해버린다.

네타냐후의 후임인 아리엘 샤론 총리(2001-2006 재임) 역시 강경파였다. 그는 2000년 9월 28일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들어간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총리가 성전산을 직접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샤론은 무장경찰을 대통하고 성전산에 들어간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영토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당연히 크게 반발했고, 샤론은 항의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린다. 13명이 즉사했고 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2000년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난다.

 

제2차 인티파다 기간인 9월 30일, 12살의 자말 알-두라는 이스라엘군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 아버지인 자말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나 살았다. 둘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자살테러가 빗발친다. 2000년부터 3년간 약 100여 건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자국의 피해를 막기 위해 높이 8m의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거주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 된 것이다. 지중해에 접해있는 가자지구는 심지어 바다까지 막았다. 가자지구는 물자 공급을 위해서 이집트까지 땅굴을 파 연명하고 있다. 물론 땅굴도 발견되면 이스라엘 군이 가차 없이 파괴한다.

베들레헴의 장벽

제2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이래 4년 동안 5천 명이상의 팔레스타인인과 1천 명 이상의 이스라엘 국민이 사망한다. 그러나 아리엘 샤론 총리는 강견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시위에 돌을 던지면 미성년자라도 체포하여 수감시켰다. 2000~2017년까지 1만 2천 명의 아이들이 수감되었다. 이스라엘 법상 영장없이 6개월까지 구금할 수 있다.

끝나지 않는 갈등


2014년 6월 12일, 이스라엘 10대 소년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곧이어 17세 팔레스타인 소년이 불에 타 죽은 채로 발견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2014년 7월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전쟁에 돌입한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6만 명의 지상군을 투입했으나 가자지구의 하마스를 축출하지는 못했다.

▷ 이스라엘 소년이 납치 살해당한 것과 별개로 팔레스타인내 온건파인 하파와 강경파인 하마스의 연립정부가 들어서는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견제, 보복성 공격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상군을 투입하기 전부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폭격을 가했다. (추가 끝)

2017년에는 트럼프가 집권하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발언을 한다. 1947년 이래로 예루살렘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으로 인정해온 전통을 뒤집은 것이다. 이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선제공격을 가하고 이스라엘은 반격했다.

2018년 5월 14일,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을 가로지르는 분리 장벽 근처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이스라엘군이 총격을 가했다. 하루에만 60여 명이 사망하고 2천7백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2020년 8월, 트럼프는 이란 견제책으로 이스라엘과 수니 아랍국가 간의 아브라함 협정을 추진, 마무리짓는다. 여기에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되는 로켓들과 이를 격추시키기 위한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2021년 5월에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11간 4300개의 로켓포를 쏘았다. 이스라엘도 즉각 보복에 나섰고 양측에서 3백여 명의 부상자와 2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 네타냐후 정권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하마스가 로켓포로 예루살렘 등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공군을 동원해 가자지구를 폭격했다.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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